◎최연소·다선 의원 “신기록”/청련·인간미 정적도 반해/반유신·단식 화려한 민주 투쟁/“3당 합당직전 가장 고뇌” 술회제14대 대통령당선자 김영삼. 지난 61년 5·16과 더불어 30여년 동안 이땅에 드리웠던 군사문화의 장막을 걷고 문민정치의 새시대를 연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꺾일줄 모르는 정치인이다.
독선과 아집, 이합집산과 정쟁으로 얼룩져온 우리 정치사의 파행에 종지부를 찍고 「21세기를 위한 정치」를 염원한 국민들이 한표 한표를 모아 선택한 김 대통령당선자에게는 이제 민주화의 완성을 토대로한 신한국 창조의 대장정이 펼쳐져 있이다.
「결단의 정치인」 「소신과 용기의 소유자」 「대세와 순리를 중시하는 지도자」…. 김 당선자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하다.
또 25세의 최연소 나이로 정치에 입문해 원내총무 5회,대변인 2회,야당총재 4회,13대 대통령후보,여권의 「2인자」를 거쳐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최다선의원」 「최연소의원」 「최장수원내총무」 「최연소총재」 등 그의 정치이력서는 각종 신기록으로 가득채워져 있다.
한마디로 그의 정치역정은 한국 현대정치의 40년을 대표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김 당선자와 오랫동안 교분을 가져온 사람들은 그에게 붙어 있는 화려한 「정치적 훈장」보다는 깨끗하고 청렴한 성품을 그의 가장 큰 덕목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를 미워하며 「약점」을 찾으려했던 정적들조차 『김영삼은 도대체 돈욕심이 없는 사람이야』라며 그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김 당선자 자신도 정치생활을 통해 부정부패를 가장 경계했고 권력형 비리사건이 터질때마다 정면으로 질타해왔다. 그가 이번 선거운동과정에서 유세때마다 빼놓지 않고 『나는 대통령임기를 마치고 지금 살고 있는 상도동집에 그대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강조한 것은 자신의 인생관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 김영삼의 또다른 진면목은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금방 마음을 끌어들이는 친화력과 설득력에서 찾을 수 있다. 섬세한 말솜씨를 갖지 못한 탓인지 가끔은 「무뚝뚝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악수한 손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따뜻함은 상대의 가슴을 푸근하게 한다.
또 그는 빙빙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어 의사전달이 단순명료하다. 이것저것 따져보거나 거르지 않은 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말하는 스타일이다. 이따금 「실수」가 나와 좌중을 놀라게 하지만 그 만큼 솔직하고 꾸밈없는 대화로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하며 따라서 듣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된다. 그는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 때문에 주위사람들에 대해 친근감 또는 불쾌감을 표시할때 『문제야,문제』 『한심하군』 『잘 좀해요』 등의 표현을 자주 쓰며 엉뚱한 얘기가 나오면 『씰데(쓸데)없는 소리』 『큰일 낼 사람』이라며 말할뿐이다.
그가 외로울 때는 결단이 임박한 순간이다. 우리 정치사의 고비마다 김 당선자의 결단은 숱하게 정국의 흐름을 바꿔 놓았지만 본인 스스로는 『지난 91년의 3당합당 직전이 가장 외로운 순간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가도 하룻밤 자고나면 『안되겠다』며 마음이 바뀌기를 며칠을 계속하며 고민을 거듭 했다 한다. 끝내는 『나 하나의 안일함을 위해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 나라를 못본체 할 수 없다』며 생애 최대의 결단을 내렸다.
그는 이렇듯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기도를 하며 마음을 다져왔다. 김 당선자가 「나의 결단」이란 저서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안온한 어머니의 품 같기도,서릿발 같기도,등대불 같기도,저 밤하늘에서 빛나는 불멸의 별빛 같기도 하다』고 고백한 것처럼 그의 깊은 신앙심은 그의 정치생활을 지탱해준 큰 힘이 돼왔다. 그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구약 이사야서의 「두려워말라,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임은 새삼스럽지 않다.
김 당선자는 한번 옳다고 판단 하면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관철시키고야 만다. 때문에 그를 두고 혹자는 「감의 정치인」이라고도 한다. 정치의 중요고비마다 국민과 호흡하는 대세를 읽고 즉각 행동으로 옮기는 그의 「감」이 탁월함은 이미 정평이 있다.
어린시절의 김영삼을 기억하는 친척들이나 고향친지들은 그의 「밀어붙이기식」스타일은 지난 60년무장간첩의 흉탄에 숨진 어머니 박부연씨에게서 고스란히 물려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친척들의 말을 빌리면 어머니 박씨는 집안일 동네일을 마다하지 않는 여장부였으며 한번 일을 시작하면 중도에서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 자신도 유세에서 『이웃에게 후덕 했던 어머니는 나에게 이웃사랑을 가르쳐준 위대한 스승이었다』면서 어머니를 자신의 「정치의 젖줄」로 표현했다. 지금도 그는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도 길을 걷고 있는 노파를 보면 한참동안 그리운 눈길로 바라보곤 한다.
『우리나라를 바꿔놓은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억되고 싶다』고 약속한 김 당선자도 곁에서 보면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미자와 패티김의 노래는 다 좋아하고 최희준의 「하숙생」이나 현철의 「싫다 싫어」도 마다않고 즐겨 등는다. 자기자신이 부를 수 있는 노래로는 「선구자」 「매기의 추억」 등을 꼽지만 스스로 음치라 생각하기에 먼저 나서는 일은 별로 없다. TV나 영화도 자주 볼 기회는 없으나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먼이 주연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기억에 남는 영화라고 말한다.
그의 가족이나 친인척들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많은 친인척들이 고향인 거제 아니면 부산에서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도회지로 옮겨온 사람들도 회사원 국교교사 공무원,그리고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대부분이다. 2남3녀의 자녀들 중 차남 현철씨(33)만 아버지 곁에서 정치를 돕고 있을 뿐 나머지 4명은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이는 김당선자가 정치현실에서 격은 역경때문이기도 하다. 가택연금 중이던 82년 10월 장남 은철(36)의 결혼식때 『1시간만 풀어 주겠다』는 당국의 제의를 받고 당국의 속보이는 의도에 이용당하기 싫어 거절해야 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김 당선자의 인간적 성품은 그의 성장과정을 엿보면 면면이 드러난다. 고향 바다와 어머니의 포용력,학창시절 피부로 느낀 식민지인의 설움,대학시절 눈으로 본 건국초기의 혼란상,정치초년병으로 겪은 자유당의 독재 등은 그에게 민족의식과 민주주의를 눈뜨게 했고 그 목표를 향해 일생을 줄기차게 달려온 끈기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1927년 12월20일(음력) 거제도 동쪽 한귀퉁이에 있는 장목면 외포리 대정마을에서 갑부로 꼽히던 김홍조옹(82)과 고 박부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개구쟁이 였지만 다부진 면이 있던 그는 5세때 할아버지에 이끌려 서당에 가 한문을 배웠고 7세가 되면서 장목국교에 입학,10여㎞ 떨어진 길을 걸어다니며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통영중 시절에는 한인학생을 지독히 차별한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한 사건으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전학한 경남중에서는 축구 등 스포츠에 심취하기도 했다. 만 20세때인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해 중학시절 하숙방벽에 써붙인 「미래의 대통령」의 꿈을 키우면서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활동했다. 그러나 대학때 가장 열성을 기울였던 것은 웅변으로 대학 2년때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참가,2등인 외무부장관상을 타게 되면서 당시 외무부장관이던 창랑 장택상과 알게돼 후일 정치입문의 기회를 갖는다. 창랑의 비서로 있다가 여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2대민의원에 당선된 그는 곧 「사사오입」개헌으로 알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3선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탈당,30여년간 야당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70년 「40대 기수론」을 제창,신민당 대통령후보경선에 나섰다 쓰라림을 맛보기는 했지만 정치인 김영삼은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야당의 「실세」로 굳혀갔고 급기야 그의 진면목은 유신과 더불어 빛을 발하게 된다. 74년 신민당 총재로 당선된후 그는 유신 정권에 거세게 도전했고 79년 총재직에 재당선된뒤에는 yh사건 총재직무집행 가처분 및 의원직제명 등에서 드러나듯 「몸을 던진 투쟁」으로 유신 시대의 종언을 고하게 된다. 이때 그가 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한 시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에도 그의 투쟁은 끝나지 않아 신군부의 등장에 맞서 『이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며 목슴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고 85년 총선직전 신민당을 창당,돌풍을 일으키면서 5공정권을 퇴장시킨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13대 총선으로 출범한 4당체제가 낳은 소모적 정쟁에 김대통령 당선자는 자신의 모든 정치적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단」으로 3당통합을 결정했다. 『3당통합이후 2년은 나의 정치생활 40년만큼 길고 벅찼다』고 술회하기도 했지만 집권여당의 대표 최고위원으로서 또 총재로서 그는 엄청난 당내외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모습을 국민에게 여실히 보여 줬다.
이제 그는 『21세기로 도약하는 신 한국의 건설,이것이 내가 정치생애를 결산하며 우리국민 모두와 함께 하고자 하는 꿈』이라 말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삶과 인생의 대승부」을 걸었고 마침내 승리했다.
하지만 그의 앞길은 결코 영광의 월계관으로만 덮여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지금부터 자신의 삶이 아닌 국가와 국민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진 더욱 험한 길을 가야 한다. 그 길은 어쩌면 그가 지금껏 걸어온 어떤 정치역정보다 험난할지도 모르며 그는 앞으로 국가의 운명을 앞에놓고 더욱 고독한 결단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임을 맡아 영광보다 두려움이 앞선다』는 그의 당선소감에 깃들인 각오가 어떻게 실천될지 전국민이 주시하고 있다.<신재민기자>신재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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