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정부 당국의 편파수사·과잉단속·늑장수사 시비가 나왔을 때 우리는 「관료적 타성이 재발하지 않게 감시 감독 지휘를 철저하게 해야할 것」이라고 노태우대통령과 현승종 국무총리에게 당부한바 있다(9일자 사설). 당시 그런 시비가 나오게 된 것은 비슷한 선거법 위반사항에 대해 검찰이나 경찰이 민자당에는 관대한 반면 민주당이나 국민당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노 대통령이나 현 총리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 관료체제의 오랜 타성이 빚은 실수임에 틀림없었다.그래서 그런 습관이 다시 나타나 정부의 중립성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경고했던 것인데 아닌게 아니라 이번에 부산에서 「복집 기관장 회의」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사건은 시대착오적이다. 같은 시대 같은 땅을 딛고 사는 처지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도대체 그날 그곳에 모였다는 그들은 어느 사회의 무엇하는 기관장들인가.
물론 그 모임을 누군가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당소속 인사가 없었다니 당정협의 형식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모임의 형식이나 목적이 어떠하든간에 정부의 중립성에 먹칠을 한 것은 틀림없다. 정부의 중립의지는 중앙에서만 시끄럽게 강조되고 있을 뿐 적어도 지방에서는 그 의지가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비공식 모임이긴 하지만 참석자들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발언을 보면 기관장 모두는 중립태도를 아예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나 현 총리의 중립고수 지시를 우습게 듣고 외면했던 것이다.
부산의 예를 보면서 우리는 서울의 중앙부처 기관이나 다른 지방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공정 공명 선거관리를 지상과제로 내걸었던 중립정부로서는 국민을 대할 면목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대국민 「유감」 표명 등 정부의 신속한 대응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국민들이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은 일부 고위 공무원들의 자질이나 격조가 너무 낮다는 사실이다. 상부에서 하지말라는 일을 쓸데없이 저지르는 과잉 충성의 해프닝이 벌어지는 이유도 바로 그런 질적인 문제에서 찾아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지역감정을 부추겨서 특정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대목에선 정말 「이럴수가…」하는 실망이 앞선다. 가당치도 않은 「혁명적 위기상황」을 위협적으로 들먹이거나 비속한 말로 언론계를 모독하고 언론인 매수를 떠벌리는 그들이 과연 전직장관을 포함한 이 나라의 지도자급 인사들인지,의식수준이 그것 밖에 안되는지,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선거운동은 이제 거의 다 끝난 셈이지만 투표와 개표라는 중대한 고비가 남아있고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해야할 일도 많다. 부산 사건과 같은 몰지각한 행동이 과거의 타성에 의해 습관적으로 재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공무원들 스스로 중립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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