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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빈 블랙박스/원일희 국제부기자(기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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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빈 블랙박스/원일희 국제부기자(기자의 눈)

입력
1992.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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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 블랙박스를 둘러싼 한바탕 소동의 전말은 대충 이렇다.러시아는 블랙박스 원본을 건네준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고 한국정부와 언론이 지레 들떠 떠들어 댔다.

옐친대통령은 방한때 극적효과를 노리기위해 블랙박스를 가져왔으나 이를 러시아의 성의가 담긴 「선물」로 단정한 한국정부의 외교적 미숙과 순진함이 소동의 원인이었다는 분석이다.

파문이 확산되자 러시아정부는 『우리가 언제 원본을 준다는 약속을 한적이 있느냐』 『원본을 주면 한국정부가 이를 해독할 능력이나 있느냐』며 오히려 짜증섞인 해명을 늘어놓았다.

옐친이 블랙박스를 가지고 올 것이라는 발표가 나오고 나서도 우리정부의 내용확인 요청이 전혀 없었다니 정부로서도 할말이 없게 됐다.

결국 러시아가 「진짜」라고 사전에 말한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정부의 항의 근거도 없고 사건의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결론이 되고만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블랙박스가 지닌 상징성을 따저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수백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사건이었고 가슴에 맺힌 한을 품고 있는 수천명 유족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또 당시 미소의 미묘한 알력을 푸는 유일한 열쇠가 그 블랙박스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이렇게 중요한 블랙박스를 가져오며 마치 양국의 불미스런 과거를 청산하려는 진심의 표시인양 행동한 옐친의 「무경우」는 따져야 한다.

블랙박스 반환이 엄청난 외교적 결심인양 발표해놓고 껍데기만 가져왔을 때 예상되는 파문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러시아의 해명은 설득력이 없다. 외히려 한국정부와 한국민에 대한 또다른 농락이 아닌가.

러시아정부는 조만간 모스크바에서 다자간 위원회를 열고 진짜 블랙박스를 국제민간 항공기구에 넘겨주겠다고 한다. 블랙박스의 해독은 공신력있는 국제기구에서 한다하더라도 넘겨받는 주체는 반드시 한국정부가 돼야한다.

정부는 유족 뿐아니라 4천만 국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한 이번 사건에 대해 공식사과 조차없이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된다. 사건당시 여의도광장에 백만명이나 모인 궐기대회를 열고 소련을 비난한 주체도 정부였다. 정부는 언제까지 「안방장군」노릇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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