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중한 한표로 선거부조리 심판을여기 저기서 「저질선거」의 소리가 삐걱대고 있다. 총칼로 국민의 주권을 약탈하던 때가 지났다 했더니,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점잖은 사람이라면 차마 입에 담지못할 상소리 인신공격은 철부지 코흘리개 수준이다. 남의 당 후보를 보고 「기생오빠」니 「오라버니 동무」하는가 하면,『연설도중 오줌을 싸서 기저귀를 차는 노망난 할아버지』라는 말도 나왔다. 남의 불편한 다리를 비웃고,양김씨를 걸어 「정치건달」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저질」도 이 정도로 그친다면 혀를 차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선거가 처음은 아니지만,돈봉투로 표를 사려는 「금권선거」가 과거 어느때보다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윤관 선관관리위 위원장도 『관권개입이 사라진 대신 금권선거 조짐이 있다』고 경고했다.
총칼 앞에서 주권을 빼앗긴 일이나,돈 받고 표를 파는 일이나 똑같은 비극임을 어리석은 유권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 문제다.
그보다 더 저질선거전은 돈도 안들이고 유권자를 부추기는 「지역감정 작전」이다.
다행히 5년전에 비해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표면화 하지 않을 만큼 엷어졌다. 지난 24일 민주당의 김대중후보는 경북의 풍기·영주·안동 유세를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끝마쳤다. 영주에서는 3천명이 넘는 청중이 몰렸다는 보도였다. 민자당의 김영삼후보는 26일 전북의 정주·남원 유세를 가졌다. 남원에서도 역시 3천명의 청중이 몰렸다는 얘기다.
영·호남의 현지 분위기도 그렇지만,양김씨 모두 지역감정을 부추기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도 5년전과 다른 변화로 볼 수 있다.
이런 변화와는 반대로 국민당의 유세연설에서는 『강원도 출신의 대통령을 만들자』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한 연사는 25일 평창·홍천·춘천 등 강원도 지역유세에서 『강원도에서 경제 전문자가 나왔는데 굳이 전라도,경상도 김서방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되겠느냐』고 했다.
이러한 지역감정 작전에 놀라는 것은 정주영 후보가 평소 양김씨가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정치적 야심을 이루려하고 있다고 비난해왔기 때문이다. 또 그는 『동서화합과 남북통일을 이룩하겠다』는 말도 했다.
「동서화합」이란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풀어 화합토록 하겠다는 만일 것이다. 도무지 앞뒤가 안맞아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원래 지역감정은 삼국시대나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10조」까지 올라가는 역사의 산물이 아니고,박정희 정권이래 군사통치의 산물이었다.
왕조시대 이 나라의 선비들은 반상의 신분과 문벌과 학벌 그리고 학문을 따졌지,어느 지역출신인가를 따지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야당운동의 큰 줄기였던 한민당의 주류세력에는 호남출신이 많았던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또 대구에서 세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됐던 조재천은 전라남도 출신이었다. 적어도 엘리트층 또는 지식층에서는 지역감정을 갖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문민지배의 전통과,헌법과,민주주의에의 국민의 여망을 짓밟고 군사정권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수집단이 다수국민을 지배하기 위해 염치 불원하고 「파벌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시작한 지역주의는 5공화국때 더욱 악화됐고,오늘의 소위 「TK세력」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진정 민주화되려면 지역주의 정치가 청산돼야 하고,또 지역감정의 갈등이 풀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국민적 합의사항임에 틀림없다.
출마한 이상 물불가리지 않고 표를 하나라도 더 얻어보자고 덤비는게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리한대로 이말 저말 바꿔가면서 흥정을 붙이던 한 시대전의 시장바닥과는 달라야 한다.
「우리 고장」이란 도지사 선거라면 몰라도 감히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과거 5공화국이 되면서 「새시대」라는 말이 등장했었다. 무엇이 달라졌단 말인지 국민은 알 수 없었는데도 무조건 「새시대」라고 했다.
지금도 선거전에서 무슨 무슨 청산이네,새정치라는 말이 많다. 문제는 입에 발린 구호가 아니라,그 내용이다.
총칼에 주권을 내준 것이 억울했다면,저질 선거전에 한 표를 내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유권자는 눈을 크게 뜨고,주권자의 체통을 지켜야할 것이다. 이번 선거에 저질을 청산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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