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 참장보고 사재로 집 지어줘/판자촌서 자활꿈 이뤄백범 김구 선생의 뜨거운 동포애가 46년만에 현대식 영세민 아파트로 되살아났다.
광주 동구 학3동 858일대 영세민촌인 백화마을에 지난 20일 「사랑의 백화아파트」가 준공돼 입주가 한창이다.
피난민촌 해방촌 전재민촌 등으로 불리던 백화마을이 생겨난 것은 해방직후. 상해에서 환국,지역실정을 살피고 다니던 백범은 일제의 징병·징용에서 돌아와 일경 기마대가 있던 광주천변에 천막을 치고 연명해가는 극빈자들의 참상을 목격했다.
서울로 돌아간 백범은 즉시 국내외에서 증정받은 고서화 가구 등 선물을 내다팔아 이들이 살수 있는 집값을 마련,서민호 초대 광주시장에게 희사했다.
서 시장은 천막촌자리 8백42평에 4∼4.5평짜리 판잣집 1백가구분을 지어 난민들을 살게 했고 백범은 『1백가구가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라』는 뜻으로 백화라는 마을이름을 지어주었다.
한채에 13가구나 모여 사는 건물 8채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그뒤 조금씩 보수는 됐지만 손수레도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이 그대로인채 광주에서 제일 가난한 동네로 이어내려 왔다.
징병·징용 피해자들이 떠나거나 사망한 뒤로도 6.25 피란민,도시개발로 밀려난 철거민 등이 꼭 1백가구를 채우면서 포장마차·파출부·날품팔이 등으로 주민들은 자활의 꿈을 키우며 살아왔다.
주민들은 87년 「백화합심회」를 만들고 주거환경 개선운동과 자립운동을 시작해 시당국과 협의,주거환경 개선지구로 지정받아 지난해 7월 한많고 사연많은 판잣집을 철거하고 16개월만에 1백65가구가 살수 있는 15층짜리 아파트 1개동을 완공했다.
광주시가 가구당 1백만원을 무상지원,2백만원씩 무이자 대출해주고 은행이 19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1천1백만원씩 융자해준 덕분에 백화마을 1백가구 4백57명은 17,21,25평형 아파트에서 다시 살을 맞대며 살게됐다.
나머지 65가구는 일반 분양되고 상가의 점포들도 주민들에게 특별분양됐다. 지하 2백평의 공간은 주민들의 자활 터전인 가내부업 공동 작업장으로 쓰이게 됐다.
백화마을은 이렇게 되살아 났지만 그동안 숱한 위기가 있었다. 80년대 들어 광주시가 열악한 주거·보건환경과 재해위험 등을 들어 수차례 철거를 시도했고 86년엔 구체적인 분산이주 계획까지 수립했었다.
그때마다 주민들과 뜻있는 사람들은 『백범의 동포사랑이 깃든 마을을 없애선 안된다』고 막아냈다.
공사기간에 사글셋방을 전전하다 이삿짐을 꾸려 12월5일까지 입주완료를 목표로 돌아오고 있는 주민들은 『백범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나 안내판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광주=신윤석기자>광주=신윤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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