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유세장의 허상·실상/정달영주필(선택의 길목)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유세장의 허상·실상/정달영주필(선택의 길목)

입력
1992.11.27 00:00
0 0

◎짜고 치는 박수아닌 진정한 열광 볼 수 없나여러 부류의 청중이 유세장을 메운다. 크게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동원된,또는 조직된 청중이 그 하나이고 제발로 찾아온,또는 오다가다 발길이 멎은 청중이 다른 하나이다. 어디서나 공통되는 현상은 「동원」쪽이 언제나 유세장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플래카드나 피켓,또는 초상화를 들고 선 사람들,머리띠나 어깨띠를 두른 사람들,수기를 들고 흔드는 사람들,무슨 배지를 달아 서로를 식별하는 사람들,같은 종류의 점퍼를 입은 사람들,눈알이 충혈되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이 대개는 동원된 청중들에 틀림없다. 『대통령』을 연호하고 박수를 치며 연단위의 후보에게 열광의 몸짓을 보내는 것이 그들의 소임이다.

제발로 찾아온 청중은 태도가 좀 다르다. 우선 연단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박수를 치거나 환호를 보내는데 인색하다. 개중에는 노골적인 냉소를 보내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이다.

청중쪽에서 보면 후보의 얼굴은 까마득 멀다. 엄청난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 「육성」은 위치에 따라 알아듣기 힘든 때가 많다. 게다가 말 한마디 끝날 때마다 터져나온 『대통령』 함성이 귀 따가워서 후보가 정작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따라잡기 쉽지 않다.

유세라는 것이 어차피 이런 정도의 푸닥거리로서 기능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속편할는지 모르겠다. 후보의 메시지가 쏙쏙 먹히던 시절은 이미 아니다. 정치가의 대사자후보다는 인기가수들이 불러 제치는 로고송이 민심을 잡아 흔드는 힘을 더 지니는 세상이다.

30몇년전의 한강 백사장 유세를 향수로 간직한 세대가 찾아가보는 오늘의 유세장은 그곳에 동원된 온갖 첨담장비들에도 불구하고 오랜 사진첩에서 뛰쳐나온 유랑극단의 분위기이다.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그렇다고 코미디언이며 가수며 노래들이 그렇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TV에서 낯이 익었다. 대사자후를 기다리는 목마름도,나라와 세계의 미래를 걱정하는 진지함도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

웃고 휩쓸리고 구호를 합창하는 가운데 「홀연히」 청중의 한 가운데를 가르며 후보가 등장한다. 그도 역시 TV에서 많이 보던 낯익은 얼굴이다. 유세장은 고성능 스피커의 음량만으로 찢어져 나간다.

『특별히 이 자리에 많이 참석해주신 여성동지 여러분. 정치는 선택입니다. 인생도 선택이듯이 말입니다. 남편을 고르듯이 선택을 잘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을 위해서도 여기 이 사람을 후회없이 선택하십시오!』

후보의 메시지도 감성화의 극단을 가고 있다. 「이 고장에 예산을 집중 배정해서 공단도 만들고 고속도로 뚫겠다」는 지역공약을 쏟아부은 뒤로는 논리도 근거도 제시되지 않는 말의 성찬이 계속될 뿐이다. 청중은 고함소리와 확성기의 굉음과 떠오르는 오색풍선의 한복판에서 최면에 걸린듯 몸이 뜬다. 마비. 의식의 마비.

그들 청중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녘의 과수원에는 사과를 크리스마스 트리의 등불처럼 붉게 매단 나무들이 무수히 버려져 있다. 풍작에 수출길도 막혀 운송비조차 못건지기 때문이라는 택시기사의 설명이다.

잎떨어진 감나무에 빨간 홍시 매달린 모습을 「초겨울의 정취」로 이해한 것은 한가한 도시사람의 눈에 비친 허상이었을 뿐이다. 거꾸로,그곳 농촌의 유권자들 눈으로 모처럼 가까이에서 본 후보들은 자신의 실상 대신에 터무니없는 허상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대형 화면에 비친 영상처럼 허상의 향연이다.

『국민들도 감성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후보의 진면목 보다는 이미지관리가 더 중요해졌다. TV문화가 가져다준 반지성적 현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과학은 발달했으나 철학이나 문학같은 지적인 내용은 후퇴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TV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다고 느낀다』

유세현장에서 만난 한 후보가 객담처럼 말한 진담이다. 어느 후보든 전속 분장사와 의상전문가가 유세버스에 동승하는 것이 요즘 풍속이다. 뿐만 아니라 이벤트 전문 연출자가 후보의 일거일동을 「감독」한다. 후보는 훌륭한 배우가 되어야만 성공한다. 『쟁점이 있느냐고? 있다. 「변화」가 바로 이번 선거의 쟁점이다』라고 그 후보는 강변했다. 선거운동의 변화도 「변화」일 것이다.

대웅변가,대열변,대사자후의 시대는 과연 지나가 버렸을까. 미리 짜고 동원되고 미리 짜고 박수치고 미리 짜고 환호하는 유세장이 아닌 진정한 열광과 진정한 선택의 유세장 풍경은 다시 보기 어려울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