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장벽 허무는 축복의 장 만들자대선 유세장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그 후보들이고 그 청중들이다. 각종 노점상이 청중수만큼은 나와 있는 것 같다. 「먹이고 얻어 먹는것이」 우리의 오랜 선거풍토여서인지 모른다. 그러나 올해는 성업이 아닌듯. 소주잔에 거나해진 군상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게 변화라면 변화다.
눈에 띄는 또 다른 것은 줄줄이 코를 꿰듯 유세장에 들어오던 「동원광경」이다. 물론 당기를 앞세운 청년 당원들을 따라 그룹그룹 들어는 「소규모」들은 여기저기 있었지만 숫제 관광버스를 대놓고 동리별로 쏟아붓던 그런 양상은 이번엔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경기일원의 유세장은 그렇다.
중립내각이 유효했는지,동원이 지지와 무관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인지,모두가 그만큼 성숙되었는지,어쨌든 전 같은 마구잡이 광경은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스럽기 조차하다.
변한 것은 또 있다. 물반 고기반이라고 하더니 이건 유세장이 아니라 쇼무대다. 코미디언·사물놀이패·가수·댄싱팀이 범벅이 되어 근 1시간 호객쇼를 한다. 찬바람도 불고 빗발도 내리는 유세장에 나온 청중들에게 주최측의 「서비스」쯤은 있을 법한데 이건 너무 심하다. 주객이 전도됐다. 이 요란한 쇼에 묻혀 정작 유세는 빛을 잃고 말았다. 비디오 시대의 폐해가 이 「대통령을 고르는 자리」마저 휩쓸줄이야.
저질 코미디 대사를 옮겨논것 같은 일부 찬조연사의 말투가 거슬렸지만 그래도 유세장은 많이 나아졌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워졌다. 「정치는 축제같아야」에 너무 「충실」해버린 나머지 쇼무대 같이 돼버린 흠은 있어도 87년의 긴장「동지가 아니면 적」식의 가파른 긴장 같은 것은 없다. 5년간의 성숙이랄까. 돌팔매와 최루탄을 넘어선 것이 정말 반갑다.
유세장은 확연한 두 그룹으로 나눠져 있다. 머리띠,어깨띠,피켓,허다못해 수기라도 들고 진행자의 지휘대로 반응하는 그룹과 대개는 뒷전으로 처져 팔짱을 끼고 아무리 후보가 열변을 토해도 끔쩍않는 그룹.
그래서 1시간여의 「프리게임쇼」,30여분의 「본무대」를 통틀어 유세라는 것이 당의 세과시의 기회로는 충분해도 그 이상은 될 수 없었다는 느낌이다. 더구나 기세를 보고 될성싶은 곳을 찾겠다는 해바라기 성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거철마다 이벤트 기업이 성업이라더니 전체적인 장내구성,오디오,비디오에서 안무,음향효과에 이르기까지 어느 유세장도 모두 수준급 이상이기 때문이다.
혹 먼발치로나마 후보의 선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유세장에 나온 보상일 수 있다. 그의 혈색은 어떤지,건강해 보이는지,말이 설득력을 지녔는지,꾸밈이 없는지,무언가 뜯어 보려면 볼 수는 있는 그런 자리는 된다.
하지만 결국 후보 고르기는 조용히 자신에게 묻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이 떠들썩한 유세장들은 새삼 확인시켜 준다.
모든 선입견을 과감히 떨어버리고 누가 진정 우리의 5년을 위해 필요한 인물인가를,그것도 매우 입체적으로 자문하는 그런 과정이 오는 12월18일까지 수없이 되풀이 돼야 겠다는 것이다.
엊그제 워싱턴 포스트지는 우리 대선보도를 하면서 정책이슈 이상으로 지역감정이 중요작용을 할 것이며 결국 중부권 유권자가 향방을 결정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들이라고 달리 볼턱이 없다. 경기 일원이란 이런 특별한 주문이 걸려있는 곳이다. 서울·인천과 어울려 이곳에는 유권자 2천9백만중 44%인 1천3백만이라는 수적인 뒷받침이 있고 30년 고질인 지역병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다는 배경이 있다.
지난번 한국일보 2000년 시리즈에서 「지역갈등」을 집중토론했던 참석자들은 우리의 지역갈등이 60년이후의 우리 정치로 인해 심화됐고 그것이 이젠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었다.
이번 대선의 이슈가 무엇인가는 언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87년에는 민주화와 안정이라는 뚜렷한 답이 있었다. 경제와 변화를 후보마다 외치고 다니지만 5년전과 같은 절박함은 없다. 우리는 이슈없는 대선을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럴수록 지역주의는 맹위를 떨칠 가능성이 어느때보다 높다. 후보마다 「지역타파」를 내걸었지만 표가 목마른 그들에게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
유권자가 해야하고 그래서 중부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지역연고에 과감히 탈피해야할 20∼30대의 젊은이(전체 유권자의 약 60%,1천7백만명),특히 영호남의 젊은 이들이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지역주의 타파에 가세해줘야 한다. 지역타파는 이번 대선의 가장 큰 이슈이다.
휴일의 유세장에서 만난 어느 주한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선거는 어느 결과로도 30여년만에 문민정치를 회복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라고. 여기에 지역주의 장벽을 조금이라고 헐 수 있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축복을 추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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