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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는 고역이다./김창열 상임고문·논설위원(선택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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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는 고역이다./김창열 상임고문·논설위원(선택의 길목)

입력
1992.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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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들 공약·경륜·자금보다 체력의 싸움대선 첫날,유세의 첫 현장을 보고 싶어서,이른 아침 차를 달린다. 민자당 김영삼후보가 유세 첫 발길을 내 딛는 충북 음성까지 1시간40분­. 선거 취재로는 60년 7·29총선이후 처음 가는 길이다.

4·19 뒤,아마 우리 선거 역사에서 유일하게 관권개입이 없었던 7·29총선은,그러나 관권부재속에 일어난 개표소 난동으로 곳곳에서 투표함이 불에 타는 등 난리를 겪었다. 음성에서는 1백42명이 구속되는 사태를 빚었다. 그래서 거듭 찾아야 했던 음성은,그런 정치 열기가 믿어지지 않을만큼 인기척이 드문 한읍으로,기억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그 사이 음성은 엄청 달라졌다. 도시 꼴을 제법 갖추었다. 사통팔달한 아스팔트 진입로에 차가 붐빈다. 그 어귀에,전국체전의 「유물」이라는 거창한 사이클 경기장이 들어섰다. 거기 유세팀 헬리콥터 3대가 내린다.

안내장 삼아 받아 둔 유세 계획표는 분단위 일정이 빼곡하다. 아침 9시50분 김포 출발,10시35분 음성에서 당원 격려대회,11시30분 충주 유세,하오 1시 단양에서 당원 격려,2시30분 제천 유세,4시30분 영월에서 당원 격려,6시15분 사북에서 당원 간담회,7시 태백에서 주요 당직자 만찬.

그 사이 휴식은 단 30분. 일곱번 연설에 청중 5만3천5백명.

이런 일정이 24일까지 나흘동안 충북·강원·충남·경기도로 남나 들면서 계속된다. 그야 말로 강행군이다.

유세팀을 쫓으며 생각한다. 유세는 고역이다. 취재도 고역이다. 추워서 더 그렇다. 유권자들은 어떨까.

결국 대선은 체력 싸움이다. 망팔십의 늙은이도 체력으로 버텨야 한다. 경륜도,공약도,선거자금도 그 다음이다. 그 고역을 이겨내는 후보들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 기력이 부럽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은,적어도 그런 체력 테스트의 관문이 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구 소련이 무너질때만 해도,이바넨코,안드로포프 등 늙어 병약한 지도자가 차례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선거를 했다면,다 걸러졌을 사람들이다.

지난번 미국 대선도 결국은 40대 중반의 클린턴과 60대 후보 부시의 체력 싸움이란 면이 없지 않았다. 그 젊은 클린턴 마저,나중에는 목이 쉬어 말을 못했다. 부시는 유세도중 과학자 간담회에서 「연설하는 로봇」의 개발을 호소해 화제가 됐다. 농담이지만,반이상 진담인 비명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유세버스에서 잠시 만난 김 후보를 향해 불쑥 나온 질문도 「건강」이다.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87년때보다 더 좋습니다』

­오늘도 조깅 했습니까?

『4㎞ 뛰었습니다. 유세중에도 뛸 겁니다』

그때 누군가 작은 컵을 들이민다. 보니 담황색 유제다.

­성대 약입니까.

『그렇습니다. 87년에는 목이 쉬어 애를 먹었습니다』

선거참모가 다음 연설 원고를 가져온다. 다음 유세장 상황을 설명한다. 바쁘다.

­첫 유세의 감촉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민주와 반민주 따위 쟁점은 없습니다. 정부는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요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유권자들은 이미 결정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대규모 유세는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만,후보가 유권자와 직접 접촉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군가 옆을 찌른다. 그래도 묻는다.

­유세는 늘 혼자 다닙니까.

『집사람은 따로 다닙니다』

은근한 내조 자랑은 유세장 군중들의 환호속에 묻혀버렸다.

유세장은 늘 보던 풍경이다. 깃발과 현수막이 나부끼고,피켓이 물결친다. 군데군데 벌여선 온차장수 손수레에서 김이 오른다. 유세 초장이라 그런지,열기는 덜하다. 좋게 말해,차분하다

후보의 연설은 별 기교가 없다. 연설 앞머리에 지역 공약을 내건다. 도로공사 약속이 많다. 순식간에 「울고 넘는 박달재」가 「웃고 넘는 박달재」로 바뀐다.

연설 후반은,원고에 없는 내용인 것 같다. 개혁의 당위성과 대통령이 되었을때의 포부를 말한다. 바로 어제 만난 옐친을 인용하고,자기의 재산공개 내역을 설명한다. 활기차고 힘이 있다. 대중정치가다운 그의 본령이 십분 드러난다. 『깨끗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와 『이 김영삼이가 할 수 있습니다』라는 외침이 가장 많은 박수를 받는듯 했다.

연설은 예정보다 10분 늦게 끝났다. 농악판이 벌어진다. 그 위로,다음 유세지를 향하는 헬리콥터가 떠오른다. 다시 마이크에 이끌려,환호가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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