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조신침략증」 심포지엄서/선발대로 상륙한 일무장 14대손/김재덕씨/포로로 끌려간 한국 도공의 후예/나카자토/“양국 진정한 선린우호 관계를”국적이 바뀐후 4백년만의 만남이었다. 전쟁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일본인을 한국인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모두가 「피해자」인 까닭인지 만남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지난 14일 오사카(대판)의 국제평화센터에서는 3백50여명이 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임진왜란 4백주년을 맞아 「수길의 조선 침략 검증」을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심포지엄에는 1592년 4월13일 가토(가등청정) 군의 선발대로 부산에 상륙했다가 곧 부하 3천여명을 이끌고 투항한 일본 무장 사야가의 14대 손 김재덕씨(42)와 임란 당시 포로로 잡혀온 도공의 후예로 일본의 대표적 도자기인 가라쓰야키(당진소)의 전승자 나카자토씨(중리기원·60)가 참석했다.
임란 당시 일본에 끌려와 나가사키(장기) 노예시장에서 팔린뒤 이탈리아에 정착한 조선인의 후손 안토니오 코레아씨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아버지가 입원했다는 긴급 연락으로 서둘러 귀국,참석자들의 아쉬움을 샀다.
김씨는 청중에게 집안의 내력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평소 조선을 동경했던 그의 14대조 사야가는 부산 상륙 1주일만에 경상절도사에 투항했다. 당시 22세였던 그는 이후 경상도 의병과 제휴,일본군의 총포,화약 제조기법을 조선군에 전수하면서 왜군과 싸웠다.
조선왕조는 그에게 김해 김씨와 가선대부(종이품)을 벼슬을 하사했고 사야가는 이름을 김충선으로 바꿨다.
전쟁이 끝난후엔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정착,우록동 김씨라고도 불렸다.
김씨는 조선왕조 실록,승정원일기에도 기록돼 있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보이려고 족보 일부분을 복사,배포했다.
가라쓰 역사민족 연구소 대표인 나카자토씨는 임란 당시 끌려온 선조가 성은 모르나 이름이 우칠이었으며 함께 끌려왔던 윤각청의 자손이 오지마(대도)라는 성으로 4백년간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한국에서 차별당한 일이 없다』고 재일 한국인 2세라는 청년의 질문에 대답하고 『나는 분명 일본인 후손이자만 엄연한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김씨와 나카자토씨는 임란 4백주년을 계기로 전쟁이 양국민중에 미친 영향을 올바르게 인식,앞으로 한일 관계가 진정한 선린우호관계가 되게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심포지엄을 마련한 재일 사학자 신기수씨(청구문화홀 대표)는 『한국인이 일본인으로,일본인이 한국인으로 바뀌어야만 했던 전쟁의 참상을 당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생각해 보자는 것』이라고 심포지엄의 의미를 밝혔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오사카 경북도민회는 우록동에 무궁화와 벚꽃을 2백그루씩 심어 새로운 한일 관계의 상징이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대판=이상호특파원>대판=이상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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