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동원.「배우」와 「김동원」은 동의어나 다름없다. 김동원은 배우 외는 아무것도 아니요 배우가 모두인 사람이다. 그는 명배우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생존자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배우가 된 사람이고 지금도 현역이고 그래서 가장 오래 배우인 사람이다. 그 배우의 경력이 올해로 만 60년,나이는 희수를 맞았다. 지난 11월9일 희수연을 겸해 자전과 그를 아는 50인의 「내가 본 김동원」으로 엮은 책 「예에 살다」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축하연은 쓸쓸했다. 하객이 적어서가 아니다. 수백명이 모여 성황이었다. 그러나 국민적인 축의가 없었다. 참석자는 연극계 인사들과 친지들 뿐이었다. 웬만한 리셉션장마다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던 정치인들,그리고 이른바 각계명사들은 이날 다 어디로 갔을까. 개인적인 친교가 있고 없고는 핑계가 안된다. 대배우에게는 일면부지라도 친구 아닌 사람이 없다. 모든 사람이 지인이므로 대배우다.
김동원을 모르고 한국인 일수는 없다. 무대에 우뚝선 김동원의 당당한 모습에 숨죽여 본적 없이 성장한 정치인이나 경제인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김동원의 감미로운 음성이 이명으로 남아있지 않은 사람은 외국인이다. 그런 김동원의 축수연에는 온 국민의 송가와 감사가 만당했어야 옳다. 정치나 경제가 예술에 고개 숙여 큰절하는 예식장이기를 바랐다.
노배우 김동원은 이날 단상에 서서 『평생동안 딴 인물의 역만 하다가 오늘 내 자신의 역을 내가 하게 되니 흥분된다』고 인사말을 시작했다. 최초이자 마지막일 김동원의 김동원역을 못본 사람은 불행하다. 그 결장의 비례를 생각하면 고소하다.
김동원은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배우다. 무대에 서면 관객을 올려놓고 자신은 속으로만 운다. 그 김동원이 이날 김동원역을 하면서 울었다. 『여러분은 나를 지금의 나로 보지 말고 영원한 햄릿으로 기억해 주십시오』 하면서 목이 멘 것이다. 그것은 그의 햄릿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을 또한 울렸다.
김동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햄릿이자 최대의 햄릿이다. 햄릿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나 마찬가지다. 「예에 살다」에 기고한 인사들도 한결같이 6·25동란중 피란지인 대구와 부산에서 극단 「신협」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국내 초연할때,그리고 드라마센터 개관공연으로 재연할 때 그가 주연했던 불멸의 연기를 잊지 못해한다. 우리나라 신극의 연기사는 김동원의 햄릿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동원의 햄릿은 극장에 가는 모든 사람에게 원체험이었다. 이 기억이 관극의 출발점이 되었다. 김동원을 영원한 햄릿으로 기억하는 일은 배우의 원형을 액자에 끼우는 일이다.
김동원은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햄릿에 이어 극단 「신협」의 황금기를 이끌어 오면서 「오델로」의 오델로로,「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로,「세일즈맨의 죽음」의 월리 로먼으로 폭넓은 변신을 했고 그 대성공이 로렌스 올리비에를 능가하는 「한국의 김동원」으로 만들었다.
당대의 대배우 김동원과 동시대인인 사람은 복이다. 그를 아직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진다. 우리의 무대에 김동원이 없었으면 어쩔뻔 했겠는가. 그가 배우로 등장하는 연극이 있었으므로 우리들의 인생은 연극보다도 신났다.
관객이 극장에 가는 것은 거울을 보러 가는 것이다. 무대위의 배우는 관객의 자화상이다. 그 배우의 얼굴은 나의 얼굴이기도 하고 너의 얼굴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이 그 안에 있다. 더구나 김동원 같은 대배우일 때 그것은 가장 큰 거울이다.
김동원은 인간적으로도 거울면처럼 무구한 사람이라고들 평한다. 항상 미소 짓는 얼굴에 기품있고 단정한 신사다. 평시의 자세가 무대위에 선것처럼 흐트러짐이 없다. 게다가 배우외는 다른 사욕이 없다. 어떤 지위를 탐해본 적도 없고 시류에 편승할 줄도 모른다. 무대밖에서의 주역은 싫다. 술도 잘 마시지 않아 연극 밖에는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 가장 모범적인 인간형이다. 그의 일상의 얼굴이 이렇게 담백하고 맑으므로 그는 무대에서 천의 얼굴을 만들 수 있다.
김동원은 길을 잃어본적이 없다. 방황하지 않았다. 외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배우의 길만 걸었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확고한 신조에서 연극이라도 연기인 외의 일은 넘보지 않았다. 그의 이력에는 「배우」 두자밖에 더 쓸 것이 없다. 순수한 배우의 초상이 김동원이다.
인생이 연극인지 연극이 인생인지를 모르고 살아온 일생이었다. 이제는 분장을 지워도 배우인 얼굴이다. 그 김동원은 배우의 화신 이다. 이땅에 무대가 무너지지 않는 한 꼿꼿이 서있을 사람,그가 역을 맡았던 작품속의 주인공과 함께 영원히 불멸할 사람이다. 그런 그를 부를 이름이 기껏 「명배우」 밖에 없는가. 연극계만의 배우가 아니라 온 국민의 배우라면 온 국민의 목소리를 모은 더 큰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이 최고의 배우에게 최고로 영예로운 계관의 칭호를 따로 바치고 싶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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