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합시다』똑같은 제목의 글을,나는 2년전 4월3일에도 썼다. 그때 글의 서두는 이러했다.
『헌법이라고 못 고칠 것은 없다.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내딴의 개헌 복안도 가지고 있다』
글의 배경은,내각책임제 추진문제로 민자당의 내분이 극에 달하고,다른 한편 제1야당의 영수가 부통령제 개헌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생각한 개헌은 내각책임제나,부통령제가 아닌,보다 근원적인 것이었다.
우리 헌법은 지난 44년동안 8차례나 손질을 했으나,진선진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개헌논의가 끊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도 같은데,역시 그중 가장 으뜸가는 것은,제헌당시부터 이견이 많았던 내각책임제.
또 헌법 운영상의 문제로서,대통령의 5년 단임제가 애시당초 레임 덕(권력누수)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4년의 국회의원 임기와 맞지 않아서 불합리하다. 87년 13대 대선이 낳은 것과 같은 득표율 30%대의 「소수파 대통령」이 겪어야 하는 지도력의 한계도 문제다. 어느 것이나 심각한 결과를 빚을 수가 있는 것이므로 그 대안인 대통령의 4년 임기·1차 중임방안이나 결선투표제 도입 등은 이번 대선의 이슈가 될만한 시안들이다.
하지만,지금의 국민정서는 개헌논의를 달가워 하지 않는다. 그 사이 개헌논의가 투명치 못했던 탓일 것이다.
근래 개헌논의의 초점인 내각책임제 문제만 해도,86년 민정당의 내각제 표방은 집권연장을 위한 방편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3당이 합친 민자당 내각제 논의는 밀실·음모의 냄새가 너무 짙었고 이를 빌미로 한 내분은 지겹기까지 했다. 그 뒤끝의 내각제 논의가 지금도 정계 일각에 남아 있으나,그 논의과정은 역시 석연치 못하다. 내각제가 사람 모으기의 빌미로 되어버린 인상이고,그렇게 사람을 모았다고 해서,개헌을 관철할만한 세력을 결집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5년만의 이번 대선에서는 헌법문제가 사실상 관심 밖인 것처럼 보인다. 대선후보들의 선심공략은 무성한데 그들의 헌정비전은 뚜렷치가 않다. 헌법문제가 없는 대선,정치의 알맹이가 빠진 「정치의 계절」이다.
이 지적은 결코,내가 내각책임제,부통령제 등등을 찬성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내 「개헌복안」은 그런 것들과는 상관이 없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가 있다.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의 폭을 넓히기 위한 개헌이다.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또 존 네이스비트가 『메가트렌즈(큰 흐름들)』에서,새로운 시대의 정치 조류로 적시했던 참여 민주주의를 앞당기자는 것이다. 그 골자가 국민표결(Referendum) 국민발안(Initiative),소환(Recaii)제도인 것은 더 설명할 것도 없다.
이 점에서 며칠전의 미국선거는 참여 민주주의의 새 면모를 보였다고 할 수가 있다. 신문의 보도는 대선 결과에 집중이 되고 있지만,우리가 눈여겨 보았어야 할 미국사회와 정치의 참모습은,선거와 동시에 진행된 주민발안과 주민표결에 더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금년에 있는 주단위의 주민표결은 42개주에서 2백32건,지역단위의 주민표결은 수천건에 달했다. 이중 주단위의 표결 68건이 주민발안에 의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14개주에서 있었던 국회의원 임기제한(6∼12년),의사의 자살방조를 용인하는 존엄사법,주헌법 개정안,낙태금지법,세금감면,사형제 부활,도박장 개설,환경·소비자문제,담배세 인상 등 매우 다양하다. 여기에서 미국사람들이 품고 있는 오늘의 문제의식과 관심의 소재를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 여기 보인 주민발안과 주민표결은 식민지시대 이래의 직접 민주주의 전통에 유래한다. 그러나 이것이 대표제 민주주의를 제칠듯한 「새물결」 「새흐름」을 이룬 것은 70년대 정치불신과 시민운동이 번지면서 부터이다. 토플러와 네이스비트의 이른바 참여 민주주의 시대의 개막이다. 그리하여,환경폐기물 예탁금제도 등 환경대책이 주민발안·주민표결로 정착이 됐다. 소득세를 반감시킨 세금반란이 일어났다. 금년의 최대 이슈인 국회의원 임기제한법은 「참여의 힘」이 워싱턴 정계까지 제어할 만큼 자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전자투표 등 기술의 발달과 함께,참여 민주주의는 주단위를 넘어선 전미국 단위로 확대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를 위한 개헌,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제기했던 균형예산 개헌,무소속의 페로 후보가 제기했던 증세법안의 국민투표 개헌도 언젠가 국민발안·국민표결로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정치요,우리의 헌법문제다. 잘라말해서,헌법을 고쳐서,국민발안을 제도화하고,국민표결의 길을 넓힌다면,국민들 스스로 바로 잡을 수가 있겠다는 것이다. 그 작업도 헌법개정에 관한 헌법규정,국민투표에 관한 헌법규정 몇줄만 고치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국민적인 합의로써 내각책임제를 발안하고 채택할 수가 있다. 내각책임제를 옳다고 생각하는 정당은 이 합의과정에 참여하면 그만이다. 국회안 개헌선 확보를 위한 무리수나 밀실음모 따위는 부질 없는 것이 된다. 지자선거 시기 등 다른 사안도 비슷한 과정을 통하여 결말을 낼 수가 있다. 민의가 확연하므로 정국이 장기 경색될 까닭도 없다.
이치가 이렇다고 보기 때문에,나는 요즘 정계 일각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탐탁하게 보지 않는다. 국민의 호응을 얻을 만큼 투명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그 실현 가능성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내각제를 말하는 측을 향한 나의 제안은,먼저 국민발안의 제도화와 국민표결제도 확충을 위한 개헌으로 내각제의 길을 트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민주주의 본뜻을 살리자는 것이고,참여 민주주의의 새 조류를 선취하자는 것이므로,불쑥 내각제 개헌을 내밀었을 때와 같은 오해나 이합집산의 핀단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 참여 민주주의 취지를 다른 당에 설명하여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것이 대선을 앞두고 두번째 밝히는 나의 「개헌 복안」이다. 나는 이 복안에 합치하는 공약을 찾아 한 표를 찍기로,벌써부터 작정하고 있다.<상임고문>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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