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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기수” 타협·융화 중시/클린턴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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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기수” 타협·융화 중시/클린턴은 누구인가

입력
1992.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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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부밑서 어린시절 시련 겪어/“최연소 주지사” 꿋꿋한 삶 개척이 시각 백악관 앞에 우뚝선 클린턴 만큼 빛나는 사람은 없다. 「개혁의 기수」 「새시대의 선도자」 등 더이상 화려할 수 없는 수사들이 그 한몸에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영광을 안기까지 밤낮없이 뛰고,모든 것을 까빨리는 준열한 언론의 검증을 거쳐야 했다.

선거전의 긴박함처럼 클린턴의 인생도 벅찬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드라마로 가득차 있다.

그는 유복자로 태어나면서부터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46년 8월19일 클린턴이 아칸소주 호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을때 아버지 윌리엄 블라이드는 이미 그 석달전 교통사고로 별세한 뒤였다.

어머니 버지니아는 인근 마을 로스힐에서 사는 친정 아버지에게 어린 빌을 맡기고 뉴올리언스로 간호사 생활을 하러 떠났다.

당시 이름이 「빌 블라이드」였던 클린턴은 어머니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본적없는 아버지를 그리며 살아야 했던 슬픈 아이였다. 그러나 로스힐 마을은 흑인 밀집지역으로 술픔에 매달리기에는 하루하루 살기가 척박한 곳이었다. 때문에 클린턴은 서러움속에서 웃는 감정제어력을 체득했다.

클린턴의 어머니는 일곱살난 빌을 데리고 로스힐을 떠나 핫 스프링스로 이사,자동차 판매상을 하는 두번째 남편 로서 클린턴을 만나게 된다. 당시 생활은 윤택했지만 의붓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술만 먹으면 어머니와 빌을 구타,클린턴의 가정생활은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는 가정의 분란을 누그러뜨리는데 혼신을 힘을 다했고,그런 노력은 후일 정치생활에서 「병적일만큼 주변사람을 의식한다」는 평을 초래했다. 그가 고교 2학년때인 61년 「블라이드」라는 친부의 성을 포기하고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 「클린턴」이 된 사실에서 융화에 대한 집착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이 혼돈의 가정생활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클린턴의 고통스런 가정불화를 절친한 친구도,담임선생이나 목사도,여자친구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이중적인 생활은 대개 비틀린 심성을 유발하는 클린턴은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강인한 독립심과 타협심으로 승화시켰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우등생으로 자랐던 클린턴이 정치의 길로 들어서기로 마음먹고 호연지기를 키우는 과정은 참으로 극적이다. 고교 2학년이었던 클린턴은 63년 어느날 「뉴 프런티어」(새로운 전진)을 외치며 세계에 변화의 물결을 일렁이게 한 우상 존 F 케너디를 만나게 된다. 당시 사진을 보면 아칸소 우수 학생으로 뽑혀 백악관에간 그가 케네디와 악수하며 바라보는 눈길은 마치 신을 쳐다보는듯한 경외감 그 자체였다. 케네디는 그순간 클린턴을 「공부 잘하는 학생」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지만 그 소련은 30년후 케네디가 못다 이룬 미국의 꿈을 실현하려는 40대 대통령이 되는 드라마를 실현시켰다.

인간 클린턴의 변화는 케네디와의 운명적 만남,가정환경 등 개인적 사건만이 아닌 반전운동,인권논쟁이 불붙였던 60년대의 시대상에 기인한 바도 컸다. 그는 63년 고교졸업반때 인권운동의 뇌관을 터뜨린 마틴루터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연설을 듣고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중앙정치에 대한 동경은 그를 워싱턴 조지타운대에 가게 했으며,이곳에서 현절정치의 맛을 가르친 아칸소 출신의 거물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을 만나게 된다. 그는 풀브바라이트 사무실에서 의정활동의 과정도 배웠지만 무엇보다도 『고향을 등지고 뿌리를 잊는 인물을 정치인으로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비겁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조지 타운대를 졸업하고 나서 클린턴은 옥스퍼드대로 유학을 가고 귀국후 다시 예일대를 다니는 등 내일을 위한 경력을 쌓는다. 예일은 아내이자 정치 조언자이며 이념의 동반자인 힐러리 로드햄을 만나게 해주며,중량감 있는 친구들을 선사해 주었다.

72년 졸업후 아칸소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던 장발의 클린턴은 영원한 꿈인 정치를 향해 겁없는 도전을 한다. 74년 아칸소주의 공화당 거물인 존 폴 해머 슈미트 하원의원을 상대로 선거전을 치른 것이다. 비록 낙선했지만 무려 48.5%의 지지를 얻어 유명인사가 된다. 그때 나이는 겨우 28세. 그 여세를 몰아 76년 검찰총장 선거에서 승리하고 78년 미 역사상 최연소(32)세로 주지사에 당선된다. 그리고 그는 이상적인 계획을 추진하고 밀어붙였다. 가히 승승장구하는 세월이었다.

그러나 2년후 선거에서 클린턴은 재선실패라는 충격을 당하고 만다. 이 패배는 클린턴에게는 약이 됐다. 「낮은 곳을 향하여」라고 외치며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귀족의식을 주민들은 더이상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 쓰라린 경험은 클린턴을 「끌고가는 자」에서 「함께하는 자」로 탈바꿈시켰고,이상적 계몽주의자에서 현실적인 온건개혁론자로 변화시켰다.

어린시절 체득했던 융화와 타협,패배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82년 아칸소주지사 자리를 탈환하게 됐다. 그리고 두번 다시 낙선이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백악관까지 줄달음쳤다.

이제 그는 백악관의 주인이 됐다. 녹음 짙은 남부 전원에서 진한 뙤약볕을 받고 커온 결손가정의 사나이가 미국을 이글어갈 거인으로 성장한 것이다.<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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