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선거는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끝난 것」 같은 보도들이 쏟아지고 있다. 막판의 맹추격이 볼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 진영을 결정적으로 고무하는 조짐은 거의 없다.한국의 대통령선거는 앞으로 한달 보름쯤 남았다. 이 시점에서 어떤 후보가 우세한지,또는 열세인지를 말하기는 이르다. 선거는 아직 공고도 되기전이고,투표일까지는 또 어떤 돌출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다.
지난달 25일자에서 뉴욕 타임스는 장문의 클린턴 후보지지 사설을 썼다. 사설은 「역설적이지만」하는 단어로 시작됐다. 우선 이번 미국의 대선캠페인은 유권자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끌어모았다는 점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어떤 후보도 유권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인기없는」 선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선거의 투표기준은 「누가 최상의 후보인가?」가 아니라 「누가 가장 덜 싫은 후보인가?」가 되었다고 설명된다.
독일의 권위주간지 디 차이트에 발행인인 테오 좀머가 쓴 글(10월31일자 한국일보 3면)에도 비슷한 직설이 있다. 「미국사회가 완전한 확신을 갖고 클린턴에게 기우는 것은 아닐지라도 완전한 염증을 갖고 부시로 부터 이반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부시가 이반당하는 까닭은 역사와 세계가 변화하고 있는데 대해 그가 둔감했기 때문이다. 부시는 「역사에 대한 무감각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걸프전 승전퍼레이드가 지나간 거리에 군수산업 실업자가 내몰린」 풍경이 대표하는,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무감각이 바로 부시의 실패다.
「최상의 후보」에서 「가장 덜 싫은 후보」로 선택의 기준을 완화해야 하는 곳은 미국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유권자는 많다. A도 B도 C도 다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그들중에서는 「아무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다 못마땅하기 때문에 아예 투표를 포기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이같은 「차선의 선택」이 훨씬 민주적인 자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아무개」를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국민의 기준이다. 그들의 무엇무엇을 가려서 보야야 할 것인가. 「그래도 덜 싫은」부분을 어떻게 찾아내서 그를 확실하게 지지할 것인가. 사실 지금 드러난 후보들의 면면 정도라면 그들의 자질이나 경륜,지식,능력 등에 걸쳐 국민들로서는 모를 것이 없다고 할만한 처지이다. 너무나 오랜 세월에 걸쳐 너무나 친숙해진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선도가 떨어지는 것이 그들의 약점이자 국민의 판단을 오히려 흐리게 하는 요소가 된다. 특히 무서운 것은 인간적·사회적 편견이다.
후보들이 국민으로부터 「가장 덜 싫은 후보」로 나마 선택받기 위해서는 역사의 변화에 무감각했다는 부시의 경우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우리 정치가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하는 생각은 대선을 앞두고 있는,다른 말로해서 2천년대의 세계를 내다보고 있는,지금 이 시점의 국민의 일반적인 공감대라고 할 것이다. 미국민이 「변화」에의 욕구를 이번 대선에서 표명한 것 이상으로 한국의 유권자는 더 큰 변화의 열망을 지닌다. 무엇인가 달라져야 하고,바뀌어야 하고,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물러 설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후보들은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과 공약에서 국민의 이같은 변화열망을 잡아내야 한다. 잡아내되 「실현가능하고 과학적인 방법」이라야 한다. 허용은 안된다.
후보들의 대결이 정책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서,각당이 선거공약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그러나 그 공약이 1백개,2백개로 「듣기좋은 소리」만을 나열하는 모습은 이것이 과연 변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욕구에 부응하는 일인지,아니면 국민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속임수라도 우선은 터뜨려놓고 볼 일이라고 작정한 것인지,그 뜻을 헤아릴 수 없게 한다.
공약이 많아서 나쁠 수는 없다. 하나라도 실현이 가능해야 하고,실현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예상되는지에 대해서까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게 중요할 뿐이다. 그렇게 확실한 공약이라면 1천개라도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몇년안에 소득이 몇배로 늘고,대학의 문을 국민학교의 문처럼 활짝 열고,그리고도 대학의 질을 세계수준으로 높이고 농촌빚 얼마를 탕감하고 얼마를 들이붓고,중소기업에 몇조를 지원하고…,그런데 어디에도 그 돈을 조달할 방안은 제시하는 곳이 없다면 그 공약들을 믿을 국민이 몇이나 될 것인가.
지난번 휴거소동을 통해서도 우리 사회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그것은 한 사회가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못한채 병들었을 때 어떤 모습이 되는가하는 자기 확인이었다. 정치권의 마구잡이식 공약이 그려놓은 환상은 마치 휴거를 닮았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허황한 것은 역사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는 이 시대의 리얼리즘일 수 없다. 뉴욕 타임스의 표현을 빌려,역설적이지만,「세금을 더 내자」 「땀을 더 흘리자」고 설득하는 후보가 있다면 그는 「가장 덜 싫은 후보」가 아닌 「가장 싫은 후보」가 될까?<주필>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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