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쓸어버리듯 허허한 벌판이다. 산들만 푯말처럼 옛 자리에 솟았을 뿐 옛 길은 길을 잃고 자취들은 잡초에 묻혔다. 인연이 없는 황량한 풍경속에 적요가 으스스 갈꽃에 흔들린다.여기는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에 접한 철의 삼각지 전망대. 6·25 동란 때의 그 처절했던 격전지 한복판에 섰다.
전망대 바로 곁의 인형의 집같이 생긴 조그만 건물은 새로 복구한 월정역이다. 경원선의 철길이 여기서 끊겨 더 달리지 못한다. 남한 땅에서는 최북단의 역이다.
상허 이태준의 작품중 단편 「사냥」에 이 역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이태준의 고향인 철원 땅을 밟는 것은 그의 작품을 밟는 것이 된다.
민통선안의 광활한 철원 평야사이 길을 따라 옛 철원읍으로 간다.
옛 읍내의 중심가는 대로이던 길이 농로같은 소로로 좁혀진채 길가에 섰던 건물들은 흔적도 없다. 오직 앙상한 뼈대만 남은 3층짜리 옛 노동당사 건물이 하나,이 건물 앞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봉우재다. 이태준의 소설 「촌띄기」에 등장한다. 이 작품속의 「서문거리」 「떡전거리」는 민통선 밖의 현 철원읍이요 「밤까시」 마을자리는 민통선 안에 묶여있다. 소설 「촌띄기」는 사라진 옛 철원읍을 재생시켜준다.
이태준은 장편 「제2의 운명」에서 「철원역에서 기차를 내려 철길을 따라 서울쪽으로 약 5리 걸어 용담마을에 이른다」고 했다. 이 용담이 이태준의 고향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철원읍 율리리. 이태준은 이 철원 땅에서 1904년에 태어나 6세때 망명하는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양친을 다 잃고 고아가 된채 9세때 이 용담으로 돌아와 친척집에 맡겨지고 15세 되던 해 원산으로 달아난다.
서울서 율리리로 가자면 당시에는 기차로 철원역에서 내렸으나 지금은 경원선의 종점인 신탄역에서 하차해야 한다. 여기서 4㎞의 거리다. 자동차로는 동두천,연천을 지나 국도를 따라 곧장 북상하면 민통선의 초소가 더 못가게 막아설 것이다. 여기가 율리리다. 민가는 한채도 안보인다. 이태준의 어린시절의 집이 있던 자리는 초소에서 50m 정도밖에 안되는 민통선 안이다. 밭이 되어있다. 이태준이 다니던 봉명학교터는 논으로 변했다. 인근 야산 마루에 실향민들이 세운 망향대가 높다랗다. 남쪽으로는 그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금학산이 멀리 뾰죽하다. 그 아래쪽에 물이 잦아진채 지금도 있는 선비소는 소설 「무연」에서 노파가 돌을 싸다 메우는 곳이요 이태준이 서울 살때 낚시질을 하러오던 곳이다.
서울로 돌아온다. 성북동 248번지에 이태준이 살던 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성북2동사무소 바로 이웃이다. 돌담도 층계위 나무 대문도 예대로다. 1백평 남짓한 마당 한쪽에 아담한 기와지붕 한옥이 덩실하다. 누마루가 높직하고 문짝은 모두 유리를 끼웠다. 섬돌밑에 이태준이 심었다는 난초들이 아직 자라고 뜰에는 그때 있던 감나무가 고목이 된채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태준이 서재로 쓰던 초당이 따로 있었다는데 6·25때 허물어졌다. 이태준의 유품이라고는 책장 하나 뿐이다. 이 집은 이태준의 질녀(누님의 딸)가 지키고 산다. 가옥등기 대장상의 소유주 명의는 아직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1930년대초 이 곳으로 이사온후 어느 핸가 옛 초가를 헐고 철원 용담의 자기가 자란 당숙집을 그대로 옳겨다 지었다. 이 용담의 집 모습은 소설 「무연」에 나오고 현재 성북동 집은 이 묘사 그대로다. 서울에 그의 고향을 옮겨 놓은 것이다. 이 한옥은 서울시의 지방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태준의 작품중 「달밤」 「손거부」 「색시」 「장마」 「토끼이야기」 등에 집이 나온다. 그리고 「까마귀」 「복덕방」 등 그의 걸작들은 모두 이 곳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태준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이 집을 떠나 월북했다.
월북작가중에서도 가장 행적이 묘연한 것이 이태준이다. 1955년경 사상성의 불철저를 이유로 숙청당한후 붓을 꺾고 지방노동신문의 교정원으로,나중에는 탄광에서 노년을 보냈다고 전해질 정도 뿐 생사조차 불명하다. 살았으면 올해가 미수,11월4일은 그의 생일이다.
월북작가의 해금이후 남한에서는 이태준의 작품이 전집으로도 출간이 되었으나 오랜 단절 탓인지 과히 읽히지 않는다.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는 북에서 버려지고 남에서 잊혀졌다. 그가 남에 남긴 작품들은 사상성이 없는 순수문학이다. 상허 이태준,그는 정녕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도 괜찮은 이름일 것인가.
해방 이듬해 나온 「상허문학독본」에서 발문을 쓴 사람은 이태준을 가리켜 『글에는 화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문학사가 첫손 꼽을 단편작가이기 이전에 당대의 명문장이었다. 문장이라면 아무도 감히 그에게 근접을 못했다. 이태준을 잃어버리는 것은 대문장의 매몰이요 이태준을 모르고 한국문학을 안다 할 수 없다.
월북작가 이태준의 문학은 해금은 되었으나 아직 민통선 안이기나 한 것처럼 쉽사리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고향을 서울로 옮겨놓아 지금 누구나 그의 성북동 집을 들여다 볼 수 있듯이 우리는 그의 문학의 문을 당장 열고 들어서지 않으면 안된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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