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부터 시작된 올 추곡수매 국회심의에서 정부가 전에 없이 느긋한 표정이다. 수매가 인상률 5%와 수매량 8백50만섬은 『농민의 어려움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의원들의 호된 질책에 정부 당국자들은 「죽을 죄를 지었다」는 식으로 고개를 조아리고는 있었지만 수매가를 더 올려야 한다는 의원들의 요구를 진지하게 귀담아 듣는 기색은 아니다. 예년 같으면 여당의 지원 때문에 그럴만하다고 하겠지만 중립내각의 출범으로 여당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정부가 처음부터 『수매가와 수매량은 더 못올린다』고 못박고 나선 것은 다소 예상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그러나 현행 추곡수매 심의제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정부의 이같이 느긋한 태도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추곡수매에 관한 국회의 심의는 정부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가부만 결정할 수 있을 뿐 수매가와 수매량 자체는 오직 정부가 결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 국회에서 동의를 못받으면 내년에 열릴 임시국회에서 동의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 정부측의 전략이다.
지금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어 각 정당들이 서로 앞을 다퉈가며 수매가와 수매량을 더 올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선거가 끝나면 더이상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리라는 판단인 것이다.
정부의 이같은 전략은 결국 국회심의가 어떻게 결말이 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부안대로 수매에 나서겠다는 것이니 심하게 말하면 이번 추곡수매를 둘러싼 국회심의는 하나마나라는 이야기가 된다.
또 국회의원들도 추곡수매 심의제도에 이같은 맹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테니 어쩌면 이번 심의는 처음부터 농민들의 환심을 사기위한 말잔치로 그치도록 예정되어 있었을 공산이 어느 때보다 크다. 일부 농민단체에서는 벌써부터 이번 국회심의가 『양쪽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아예 일말의 기대조차 거두어 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리들을 상대로 당장 드잡이라도 할 것처럼 목청을 높이는 의원들이나 이들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쩔쩔매는 듯한 관리들의 표정뒤에 숨어있는 진짜 속셈이 사실은 한가지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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