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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회장 「불출마표명」 배경과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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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회장 「불출마표명」 배경과 전말

입력
1992.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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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집념… 여건 안맞자 “발빼기”/작년 12월­3·24총선­민자 경선후 잇단 신당모색/「9·18」후 각계 접촉 출마탐색/신당내 이견·시간촉박 “유보”신한국당(가칭)의 창당과 때를 같이해 불쑥 터져나온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대선 출마설은 본인의 「불출마 입장표명」으로 일단 한고비를 넘겼다.

대선을 50여일 앞둔 시점에서 돌출된 김 회장의 출마설은 대선판세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가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던게 사실. 그러나 지난 8월의 신당설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설」의 단계로 그칠 공산이 커졌다.

김 회장은 그러나 25일 대선 불출마 입장을 밝히면서도 『이제까지 신당운동을 지지해온 사람으로 대선이 끝나면 비록 조그만 「오막살이」라 할지라도 지원해줄 생각은 있다』고 말해 여전히 정치참여의 「여운」을 두었다.

때문에 김 회장의 불출마선언은 이번 대선을 계기로 해 정치인으로 변신할 생각은 간절했으나 기업가로서 갖는 「현실의 벽」 때문에 일단 뜻을 굽힌 것으로 보는게 정가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실제로 김 회장은 지난 9월말이후 각계 인사를 접촉,자신의 출마에 대한 반응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이번에 당선되기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향후 10년을 보고 나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정치참여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또 하나의 「재벌후보」라는 비난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대우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데 이는 시간적으로나 경영 현실적 측면에서 매우 어렵다는게 김 회장 주변의 얘기다.

또 김 회장이 평생을 바쳐 키워온 대우그룹을 걸고 정부나 민자당의 「뜻」을 거스르며 모험을 하기에는 현실여건상 역부족이라는 관측도 있다.

더욱이 자신이 출마할 경우 「발판」이 돼주기를 희망한 새한국당내에서도 반론이 엇갈려 있는 형편이어서 안팎으로부터 곤경에 시달리기 보다는 차라리 현 단계에서 『신당으로부터 아무런 제의를 받은바 없고 또 제의를 받아도 나서지 않겠다』며 일단 한발 물러서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김 회장이 어떤 형식으로든 신당 참여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노태우대통령의 탈당으로 민자당이 동요하기 시작한 지난 9월 하순께로 이 과정에서 논의상대는 이자헌 김용환의원이라는게 정설.

특히 김 의원은 재무장관 때부터 김 회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지난 10일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의 탈당선언이후 신당 창당추진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김 회장과 깊숙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으로 돼있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나도 평소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한바 있는 만큼 정치개혁을 하겠다고 나서는 신당 추진인사들에게 「도덕적 의무」를 느낀다』며 자신의 「정치적 관심」과 함께 신당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는 것.

10월중순들어 신당 창당이 본격화되면서 신당 추진인사들은 대선후보 영입대상으로 강영훈·남덕우·노신영·노재봉 전 총리와 김준엽 전 고대 총장 박태준 전 최고위원 등을 상정,개별적 접촉을 통해 의사타진을 했으나 당사자들이 고사하자 구체적으로 김 회장의 출마를 거론하기 시작.

김 회장 자신도 김용환의원 등을 만났을 때 『이번에는 4백만표를 목표로 하지만 향후 10년을 보고 투자하겠다』며 거의 출마쪽으로 결심을 굳혔었다는 것.

그러나 지난 주말 자신의 출마설이 정가에 확산된 이후 김 회장은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한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24일 저녁 그를 만난 새한국당측 인사는 『김 회장이 출마할 가능성은 30%』라고 언급.

김 회장은 24일 광주로 내려가기 직전 친구인 이종찬의원과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사업가인지 정치인인지 구분되지 않게 행동하지는 않겠다』며 『그러나 지금은 사업가로서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려 정치인으로 나서기 어렵다』고 불출마 의사를 완곡히 밝혔다는 것.

○…김 회장은 25일 광주에서 『믿지 않겠지만 내가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했으나 김 회장이 신당 창당 등 나름의 정치개혁에 구체적 관심을 기울인 시기는 국민당 탄생전인 지난해 12월부터라는게 정설.

당시 김 회장은 언론회견 등을 통해 정치 개조론을 펴면서 『일본의 「마쓰시타 정치의숙」 같은 신진정치인 양성기관을 설립하고 싶다』는 뜻을 표명했고 대우그룹내 「한국정치연구회」라는 별동대를 가동시킨 것도 이 때라는 후문.

특기할점은 이 시기를 전후해 정부의 몇몇 모인사들이 김 회장에게 신당 창당과 총선참여를 김 회장에게 권유했다는 얘기. 김 회장은 이 때 마음정리와 기업문제 등을 들어 이 권유를 거절했다는 것인데 라이벌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금년 1월 발빠르게 국민당을 창당하고 나오자 자신의 주저함을 적지않게 후회했다는 전언.

이같은 후회는 3·24총선전 경기고 동창인 이종찬의원에게 신당 창당을 제의하는 적극적 의지로 나타났지만 대통령후보 경선을 준비하던 이 의원이 소극적 자세를 보여 일단 무산.

○…이에 따라 김 회장이 정치권의 변화모색에 본격 나선 것은 총선후 민자당의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이 때 김 회장은 이 의원에게 상상한 자금지원 약속과 함께 물밑으로 「친이종찬」 세규합에 나서며 『경제를 비롯한 나라문제를 해결하려면 개혁의지를 가진 50대 지도자가 나서야 한다』는 지론을 줄곧 개진. 이같은 생각이 지난 8월 관훈토론에서 「50대 영웅대망론」 「50대 역할론」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어쨌든 김 회장은 경선과정에서 당시 박태준 최고위원은 물론 김종필위원에까지 손을 뻗쳐 「양김 극복론」과 이 의원 지지를 설득했다는 것.

그러나 경선 양상이 외압 파문속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 의원에게 『탈당해 아예 새 당을 만들자』고 권유했고 이것이 이 의원의 경선거부 결행의 주요요인으로 작용. 이후 김 회장은 민자 민주 국민당 의원을 비롯,학계 재계 종교계 인사들과 활발히 접촉,정치개혁을 주도할 신당 태동의 불가피성을 역설했고 이러한 행보가 줄곧 이어지면서 8월초 이른바 「김우중 신당설」 파문으로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나는 신당의 총무국장을 맡아 새정치세력을 키우는 일만 하겠다』고 역할한계를 설정하는가 하면 『지금이라도 신당이 출범하면 여야 의원이 대거 합류,최대 60여석의 원내 의석확보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했다는 소문도 나왔다.

○…물밑 신당작업 과정에서 신당설이 여론에 표면화돼 주춤거리던 신당 행보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계기는 노태우대통령의 「9·18 민자 탈당」. 이에 뒤이어 박태준 최고위원이 거취문제의 「대사색」에 들어가자 김 회장은 각계 인사들을 만나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고 『도와달라』고 직간접으로 부탁하기 시작했다는 후문.

김 회장은 급기야 노 대통령의 방중을 수행,북경에서 노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를 갖고 대선출마의 의중을 처음 밝힌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초 신당의 「총무국장」역에 만족하겠다던 생각이 후보출마까지 비화된 과정은 확연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후 김 회장은 각계 인사와의 접촉에서 『양김을 대체하고 정치와 사회를 개조할 의지를 가진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는 입장과 함께 자신이 나설 뜻이 있음을 은연중 개진했다는 후문.

한편 지난 3일 김 회장의 요청으로 회동한 박태준 전 최고위원이 지난봄부터 신당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김 회장의 행적에 일관성이 없다는 불만을 표출하며 협력의사를 유보한 점과 신당내에서 김 회장 영입에 소극적인 그룹이 있다는 점 등을 김 회장의 불출마 배경과 무관치 않았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신재민·이유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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