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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이 뜻하는 것/김창렬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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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이 뜻하는 것/김창렬칼럼(토요세평)

입력
1992.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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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른바 「상징천황」 아키히토(명인) 내외의 방중보도를 보면서 몇사람의 이름을 떠 올린다. 모두가 그와는 구면인 사람들이다.그중 한사람은 베이징 자금성 근처에 숨어사는 86세 노인이다. 이름은 아이신교로 푸지에(애신각라 박걸). 그의 성이 말해주듯 그는 청황실의 후예다. 정확하게는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후에는 일본이 조작한 만주국 황제였던 푸이(박의·1906∼1967)의 동갑내기 동생. 푸이에게 후사가 없었던 탓으로 만주국 제위의 제1번호 계승권자로 꼽히기도 했던 사람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바탕이된 푸이의 자서전(나의 반생)을 보면,젊은시절의 푸지에는 군인이 되어 청 황실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가출을 감행했던 열혈청년이다. 결국 그는 일본군의 만주국 공작에 말려 도일,일본의 귀족학교 학습원과 육군사관학교를 다녔고,강요를 못이겨 일본 귀족(후작)의 딸과 정략결혼한다. 그러니까 그는,아키히토와 학습원 동문이다. 아키히토 초청으로 점심을 함께 한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전쟁뒤 소련군에 붙들린 그는 형 푸이와 함께 소련과 중국안 수용소를 전전한다. 사실은 아키히토도 자칫 같은 처지로 떨어질뻔 했다. 미국의 대일 전후처리 정책입안에 깊이 간여했던 중국학의 대가로 오웬 래티모어 같은 사람은,일본 천왕가의 모든 남자를 중국 땅에 억류하고 국제감시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키히토 내외는 억류의 땅이었을 수도 있는 중국을,세기의 국빈자격으로 찾은 셈이 된다. 푸지에 노인이 그와 상면할 기회는 없을 것이지만,두사람의 대조는 너무나 뚜렷하다. 외신기자에게 아키히토 내외를 환영한다고 말했다는(북경=로이터) 그의 속마음이 궁금해진다.

다음은,역시 숨어사는,중국의 최고실력자 덩 샤오핑(등소평)이다.

등소평은 14년전 바로 어제(78·10·23) 중일 우호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일본을 방문,당시의 히로히토 일황을 만났다. 그 자리에는 태자 아키히토도 배석했다.

항일전의 투사를 맞아 긴장했던 이 만남뒤에는 약간의 파문이 일었다. 일본측 발표인 즉,등소평이 먼저 「지나간 일은 과거로 돌리고 전향적인 우호관계를 건설하자」고 말을 하자,히로히토는 「과거 한때의 불행한 일」에 언급하며 회답했다는 것이었으나,중국측이 보도한 발언순서는 그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얼마만에 밝혀진 진상은 중국측 보도대로였고,일황의 발언은 예상 밖의 해프닝이라는 것이었다. 등소평이 아키히토 내외를 만날 예정은 없는 모양이지만,그가 14년전을 감회 어리게 회상할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방중길 아키히토의 또 다른 구면은 89년 방일 때 그를 처음 초청한 수상 리펑(이붕)이다.

이붕은 그가 즉위한뒤 처음 면담한 중국 요인인데,이 만남뒤에도 등소평 때와 비슷한 일이 생겼다. 일본측은 새 일황이 과거역사에 대하여 평소의 「진의를 말했다」고 어물어물 했으나,중국측은 그가 「불행한 역사」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밝혔다고 못박은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선대가 말했던 「불행」에 「유감」을 더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어제 저녁 환영만찬에서 있은 그의 답사는 진일보한 것이다. 「우리나라(일본)가 중국 국민에게 끼친 다대한 고난」 「내가 깊이 슬프게 생각하는 바」 「전쟁을 되풀이 않는다는 깊은 반성」 등은 90년 5월 노태우대통령 환영만찬에서 그가 말한 사과발언과 수준이 비슷하다. 다만 그때 말했던 「통석의 념」 대신에 나온 「깊이 슬프게 생각하는 바」는 74년 히로히토 방미 때 썼던 말(deplore)의 재탕이다. 적어도 한 미 중 3국에 대한 사과발언의 수준은 균형이 잡힌 셈이 된다.

그러나 아키히토 방중을 거듭 요청하면서,그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던,등소평과 이붕의 중국정부는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푸지에와 같은 사람들의 일반 민심은 어떨까. 정부 통제아래 숨겨왔던 반일감정이 사그러들까. 민간 배상요구는 고개를 숙일까.

안됐지만,내 대답은 아무래도 부정적이다.

좀 거창한듯 하지만,아키히토 방중은 중일교류 2천년에 처음있는 일이다. 그야말로 역사적이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일본 헌법 제1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그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러나 이 역사성과 상징성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오래된 화친의 역사보다 몸 가까이 경험한 수난의 역사가 무겁다. 「상징천황」에게서 우리는 일본이 마땅히 감당했어야 할 침략책임의 상징을 본다. 아무리 성격이 달라졌다고 해도,천황제의 상속자인 그가 「평화일본」의 상징으로만 비치지는 않는다. 대다수 중국사람의 생각도 별로 다를 것 같지는 않다.

그 때문에 아키히토 방중을 보는 관심은 갈수록 착잡해진다. 그것이 사실은 우리를 둘러싼 지역대국간의 거래라는 정치적 의미를 자칫 잊기까지 한다.

그래서 속으로 묻는다.

우리나라라면 어떨까. 그의 방한이 그의 방중처럼 이뤄질 수 있을까. 대답은 역시 부정적이다. 아키히토 방중이 그의 방한 길을 열 것 같지도 않다. 그의 베이징 만찬사를 읽고 나서도 생각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불행한 일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분명하기는 역사의 극복이란 수사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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