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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켈리 부부 「정치염증」에 “동반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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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켈리 부부 「정치염증」에 “동반자살”

입력
1992.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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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내 권력다툼·좌익제휴등 실망/순수 평화환경운동 노선 고수로 소외【베를린=강병태특파원】 지난 19일밤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된 독일의 저명한 반핵 평화주의자 페트라 켈리(44·여) 부부는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과 고립감 때문에 동반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독일정계는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80년대초이래 독일의 반핵 평화운동과 녹색당의 의회진출의 선봉장이었던 켈리는 경찰 조사결과 정치적 동반자로 오래전부터 동거해온 게르트 바스티안(69)의 38구경 권총으로 침실에서 함께 자살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핵운동의 잔 다르크」로 불렸던 페트라 켈리는 독일 반핵 평화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동반자 게르트 바스티안은 미국의 퍼싱Ⅱ 핵미사일의 독일배치에 반대,독일군 12기갑 사단장직을 박차고 반핵 평화운동에 뛰어들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육군소장 출신이다.

페트라 켈리는 60년대말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한뒤 에드워드 케네디의 보좌관을 거쳐 EC(유럽공동체) 위원회 본부에서 일하다가 반핵 평화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79년 제1야당 사민당에 참여,80년부터 시작된 퍼싱Ⅱ 미사일 배치 반대운동을 이끌면서 탁월한 언변 등 행동력과 미모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었다. 그는 이후 반핵 평화주의와 환경보호를 기치로 내건 녹색당 창당을 주도,녹색당의 대외적 「얼굴」역할을 수행했다.

게르트 바스티안은 16세 때 독일군 사병으로 대소전에 참전했고 56년 대위로 서독군에 다시 참여,12기갑 사단장에까지 오른 전형적인 군인이다.

그러나 그는 79년 슈미트 사민당 정부가 미국의 퍼싱Ⅱ 미사일 배치를 수용키로 결정하자 공개적으로 이에 도전,자진 전역한뒤 반핵운동 진영 맹장으로 변신했다.

이들은 이후 나란히 녹색당의 기수로 활약,83년 녹색당의 의회진출을 이끌면서 함께 의회에 등단했다. 페트라 켈리는 의정활동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러나 규율과 절도가 몸에 밴 게르트 바스티안은 자유분방한 녹색당의 체질에 이질감을 보였으며 녹색당 특유의 의원직 2년 교대제 등에 반대해 87년 녹색당과 결별했다.

페트라 켈리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녹색당이 동구 공산당과 연계를 갖는 등 좌익의 목소리가 커지고 정당내 권리다툼 등 기성 정당화되는데 좌절감을 표시해왔다. 이들 부부는 모두 순수 평화주의와 환경운동 노선을 고수,갈수록 녹색당 주류에서 벗어나 고립돼왔다. 이들은 이 때문에 90년에는 의회진출에도 실패했고 이후 좌절과 고립은 깊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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