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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도 내놔야 한다(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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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도 내놔야 한다(사설)

입력
1992.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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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전 격추된 KAL 007기의 미스터리가 속시원히 풀려 하늘과 바다를 떠도는 피격승객들의 원혼을 달래줄 수 있을까 했던 국민적 기대는 이번에도 불발로 끝났다. 14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인도주의와 인류도덕 부응까지 들먹이며 양국관계 증진을 위해 우리 정부에 전달한 KAL기 격추사건 자료는 우리가 기대해 왔던 진상규명에 훨씬 미흡한 것으로 드러나 실망이 앞선다.이번에 전달된 자료는 그동안 소련 KGB·국방부 및 항공부가 보유하고 있던 일부 블랙박스 해독 내용 등 12건의 문건으로 되어있지만,블랙박스나 그안에 담긴 테이프 그 자체 등 자료의 핵심이 빠져있다. 또한 소련군 자체의 정확한 출동·공격경과와 잔해 및 승객 유체수습과 처리결과 등의 자료도 없어 이번에 전달된 거두절미식의 단편적 자료만으로는 사건의 명확한 진상은 물론이고 책임소재를 확인하기도 어렵게 되어있다.

우리 대표단의 전달자료에 대한 현지에서의 1차 평가결과도 국제민간 항공기구가 이미 조사한 내용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KAL기가 당시 간첩비행을 하지않은 것으로 확인할 수 있으나 항로이탈·격추과정이 명확치 않기 때문에 우리 대표단은 불랙박스 테이프 원본인도를 요청키로 한 모양이다. 방한을 앞둔 옐친 대통령은 양국 관계를 떠나서도 그 원본을 인도할 의무가 있음을 자각,조속히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소련이 건져내 감춰온 블랙박스는 분명히 우리 재산이기 때문이다.

미흡한 자료나마 전달되기에 이른것은 물론 구소련의 해체와 한·러시아간의 긴밀해진 관계 때문이다.

옐친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에게 앞서 보낸 친서에서 인도주의의 신성한 의무임을 강조한것도 따지고보면 러시아가 격추자체에 대한 직접 비판을 받을 대상이 아닌데다 지료전달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득까지 고려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친서에 이어 대통령이 직접 전달식에 나와 거듭 인도주의와 우의를 다짐한 전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정치적 의도나 형편이 그런데도 이번에 러시아가 모든 진상의 공개를 주저하는 이유를 우리는 쉽게 납득할수가 없음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단편적 자료의 선별공개 및 제공과 계산된 홍보만으로 비무장 민간여객기를 무차별 격추시켜 수백명의 인명을 앗은 유례없는 국제적 만행의 짐에서 쉽게 벗어날수가 있고,국제사회에서 신생 러시아가 참된 인도주의 국가로 대접받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너무나 섣부른 기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제라도 정확한 자료제공과 진상공개에 더이상 주저함이 없기를 바란다. 오히려 기대를 앞지르는 자발적 자료공개와 솔직한 책임인정이야말로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과 한·러 우호증진에 한층더 기여할 것임을 강조해둔다.

우리 정부도 이번 기회에 블랙박스 인도,진상규명 및 배상문제를 완결함으로써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는 원혼들을 달래고 양국관계의 걸림돌을 없앨 수 있도록 가일층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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