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정책 추진 동구와 화해… 71년 노벨평화상【베를린=강병태특파원】 9일 서거한 브란트 전 서독총리는 「접근을 통한 변화」를 표방한 동방정책(Ost Politik)으로 동서냉전 타파와 독일 통일의 초석을 깐 선구자였다. 냉전시대의 완강한 질곡을 깬 선구적 예지와 용기로 그는 이미 생전에 「냉전시대의 현인」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추앙됐었다. 뿐만 아니라 반나치 투쟁 등 불의에의 도전과 「억눌린 자」를 위한 사회민주주의 이상에의 헌신,그리고 국제평화주의와 남북간 격차해소를 향한 노력으로 일관한 브란트의 일생은 그를 이 시대의 위인의 대열에 올려 놓기에 충분하다.
1913년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뤼베크에서 소비조합 여직원의 사생아로 태어난 브란트는 열성적인 사회민주당원이었던 외조부의 영향으로 일찍이 사회민주주의와 정치에 눈을 떴다.
17세때 사민당에 입당,청년조직의 리더가 된 그는 히틀러 나치정권의 탄압이 시작되자 덴마크를 거쳐 노르웨이로 탈출,역사학을 공부하면서 저널리스트로 나치학정을 고발하고 국내 항쟁을 촉구하는 글을 쓰는데 몰두했다.
그는 37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뛰어들어 프랑코의 파쇼체제 고발에 나섰고,스페인 노동자들의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40년 나치의 노르웨이 점령당시 체포돼 한때 감옥에 갇혔던 브란트는 신분을 속이고 풀려나 중립국 스웨덴으로 다시 탈출,반나치투쟁을 계속했다. 그는 이때 북구식 사회민주주의의 열렬한 신봉자가 됐다.
종전후 그는 노르웨이 신문의 독일주재 특파원으로 귀국했다가 베를린주재 노르웨이 군사대표단의 언론담당으로 일한 것이 인연이 돼 베를린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48년 독일 사민당의 베를린 점령군 당국 파견관이 된 그는 49년 초대 독일연방 의회선거에서 베를린 지역의원으로 당선,중앙정계에 입문했다. 그후 베를린 시의회 의장을 거쳐 57년 서베를린 시장에 당선돼 「숙명의 도시」 베를린의 운명과 행로를 함께하게 됐다.
60년 이미 사민당의 총리후보로 부상했던 그는 61년 베를린장벽 구축으로 분단과 냉전이 고착되기 시작할 때 베를린 시민과 독일인을 향해 역사의 변전에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맞설 것을 촉구하며 민심을 이끌어 국민적 지도자로 자리잡았다. 이후 64년 사민당 당수로 선출돼 87년까지 무려 23년간 사민당을 이끌었다. 69년 자민당과의 동맹구축을 통해 전후 최초의 사민당 정권을 수립,서독 총리에 오른 브란트는 집권직후 역사적인 동방정책의 기치를 올리며 독일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서냉전이 첨예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전쟁을 막고 독일민족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동독을 비롯한 소련 동구권과의 화해와 공존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브란트는 「접근을 통한 변화」를 표방하면서도 전후 서독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동독을 방문,동독인들과 간접적인 해후를 이룩했다. 이와함께 소련 폴란드 등 과거의 적국과 화해의 길을 열었다. 그는 특히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무명용사 기념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치의 죄과를 사죄,「역사의 짐」을 덜고 동서독 접근에 대한 동구권의 양해를 얻어냈다.
이 동방정책으로 브란트는 7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동서독은 72년 양동간 통행협정과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73년 유엔동시가입 등으로 공존과 통일을 향한 장도에 접어들었다.
그는 74년 보좌관 기요르예가 동독 간첩이었던 사실이 밝혀지자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총리사임후에도 브란트는 동서냉정 종식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집념으로 사민당을 이끌어 사민당과 독일 정계의 「대부」로 영향력을 행사했고,국민적 신망을 누렸다. 또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의장과 남북위원회 위원장으로 국제평화운동과 국제정의 실현노력을 주도했다.
브란트 임종을 앞둔 지난달 24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총회에 보낸 고별메시지에서 『냉전은 끝났으나 국제평화와 정의실현은 아직 멀다』고 경고하면서 『평화와 정의를 위한 사회민주주의운동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를린에서 열린 SI 총회장은 「영원한 사회주의자」인 브란트의 「유언」이 낭독되는 순간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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