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다섯번째 총리를 맞는다.교대가 너무 잦다 싶기는 하지만 우리 헌정사에 비추어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48년 정부가 선 뒤의 44년 사이,총리자리를 맡았던 이는 연 31명(서리 5,수반 3명)이다. 그중 총리제도가 없었던 기간(56·1∼60·4)을 빼고 나면,이들의 재임기간은 평균 14개월쯤 된다. 이로써 보면 5공 7년의 일곱총리,6공 5년의 다섯총리도 이 전례를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굳이 따져보면,6공 다섯총리는 전대와 다른 특징을 지녔다고 할만한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6공 다섯총리는 모두 대학교수를 지낸 박사총리들이다. 그중 4명은 서울대학 출신,3명은 서울대학 교수,3명은 이북출신이다. 이들은 전공에 관계없이,이념적인 정향은 뚜렷하나,단명했던 한 사람을 빼고는,정치적 색깔이 거의 없으며,한 사람을 빼고는 행정관리와 정치경험이 없다. 말하자면 명망이 있는 비정치 총리,실무경험이 없는 실무총리들이다.
이 특징에서 모양새를 좋아하는 6공 대통령의 인사취양을 본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우리 헌법상의 총리란 본디 그런 자리인 것도 같다. 그 자리는 헌법이 규정한 권력서열 제2위라고 하지만,총리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보좌관이며,이 점에서는 국무위원(각부장관)과 자격이 동등하다(헌법 제86·87조). 그는 각부업무를 통합하나,국무회의 의장은 아니다(헌법 제88조). 그에게 국무위원 제청권이 있다고 하나,이번 중립내각 구성에서 보듯,그것은 대통령과 장관인사를 협의하는 것이 고작일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그런 협의조차 없었던게 실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중립내각을 구성한다는 것 자체는 총리를 바꾼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반면,누구가 총리로 되느냐는 그리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중립내각을 한다는데,현 총리의 유임설이나 전 총리의 재기용설이 가능했던 것이다. 총리 인선에 대한 거부권을 가진 셈인 야당들이 대통령 고유의 인사권 운운하며 여유를 보인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9·18조치」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탈당으로 상징되는 「노심」에 모일 수 밖에 없다. 그 조치의 제1단계인 중립내각이 구성된 지금,야당은 대통령의 탈당이 빚어낸 여권의 혼란이 마냥 기꺼울 것이지만,속깊은 곳의 「노심」은 앞으로 두고 보리란 자세를 흐트러 뜨리지 않고 있다. 중립내각의 구성은 정국수습의 한 수순일 뿐,정작의 고비는 이제부터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 「이제부터」가 어떻게 풀릴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대통령 탈당에서 비롯된 여당의 지각변동이 어디까지 갈는지,당초 의도하지 않았던 그 혼란을 수습하는 방향으로 「노심」이 동할지,그런 경우를 포함해서 야당이 「노심」을 못믿겠다고 트집잡고 나오는 새로운 사태가 생기지는 않을지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한번 정국이 경색되는 경우에는 사태가 「9·18」 이전보다도 심각하리란 걱정이 없지 않은 가운데,당장은 다음 두가지가 관심거리로 떠오른다.
그중의 하나는 그 사이 보아온 대통령 통치 스타일과 관계된다.
언젠가 그는,정치는 당에 맡기고 경제에 전념하겠노라고 한 적이 있었다. 모양좋은 나들이 외교에 매달리느라 내치가 소홀하다는 비평도 들어왔다. 그처럼,선거관리는 중립내각에 맡기고,무당적을 이유로 대선기 날카롭게 대립될 정국관리를 나 몰라라 하는 일은 없을까.
중립내각을 발족시킨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히 많은 것을 내각에 맡겨야 하겠지만,대통령이 「진두」에서 물러서는 경우에는 아무리 명망있는 중립내각이라도 그 구실을 다 할 수 없을 것은 당연하다. 무당적 대통령과 중립 총리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어떻게 그의 내각을 운영할지가 요긴한 숙제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중립내각을 했다고 해서 대통령 책임제가 대통령 무책임제로 되지는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다음의 관심은 중립내각의 역할이다.
새 총리는 총리직을 수락하면서 선거관계법의 엄격한 집행을 말했다. 공명·공정한 선거가 「중립」의 뜻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자면,선거관리는 선거관리위원회 소관이다. 정부가 할 일은 이 헌법기관 본래의 소임이 온전하도록 보장하며,관권과 금권 등의 훼방이 없도록 단속하는 것이다. 중립내각이 아니라도 의당했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중립총리·중립내각이 따로 할 일은 무엇인가. 앞에 말한 보장과 단속은 중립의 소신과 의지,호령과 지시만으로는 만전할 수가 없다. 선거의 공명과 공정을 새로 담보할 제도장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립내각이 할 일이고 중립내각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의 선거제도를 엄격하게 집행한다는 것은,「중립」을 내세우기에는 너무 소극적이다.
그런 뜻에서 중립내각은 소극적인 선거관리내각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거개혁 내각이어야 한다(9·26자 본란). 그렇기 때문에 새 내각은 지금까지의 선거가 왜 공명·공정하지 못했던지를 살피는 지혜와,정치권의 이해를 조정할 정치력,한차원 높은 곳에서 개혁의 골자를 결단하고 추진할 소신과 능력을 요청받는다.
이렇게 공명대선을 위한 무당적 대통령의 책임과 중립내각의 역할을 확인할 수가 있다면,눈앞의 첫 과제가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촉박한 대선일정에 맞추어 당장 선거개혁안,특히 관권중립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전문가의 의견과 여론을 들어야 할 것이지만,다음 두가지는 꼭 지적했으면 한다.
그 첫째는 중립내각의 가장 큰 사명인 관권중립은,공무원들의 신분보장으로 달성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관권부정의 강요로부터 공무원들이 자기를 보호할 수가 있어야 한다. 내부고발자,부정지시,강용에 대한 거부행위가 보호받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 반면 정당한 선거사무는 끝까지 보호받아야 한다. 선거사무의 방해,허위사실 유포,중상행위를 엄벌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다음은 선거감시에의 시민참여다. 선거의 공명은 시민의 호응이 있어야 가능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공명선거를 위해서 시민들 스스로 관권과 각당의 선거행태를 감시하는 것 이상의 효과적인 방법은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이를 위한 법제정비가 꼭 필요하다.
정국혼란과 선거소동에 식상한 국민들은 전례가 없는 중립내각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기 전에,전례에 없는 개혁의지로 「중립」을 실증해 주기 바란다.<상임고문>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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