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선비” 새정치 기대/고대 4·18데모 “다친다” 눈물로 만류/법학저서 인기… 본보 논설위원 역임교직을 천직으로 삼아 평생 외길을 걸어온 교육자는 일생에서 처음이고 가장 중요한 「외도」를 노심초사 끝에 결정했다.
7일 중립내각의 신임총리로 발탁된 현승종 교총회장(73·한림대 총장)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 시대의 대표적 스승」 「마지막 선비」라는 말을 스스럼 없이 해왔다.
현 회장은 바른 말을 서슴지 않는 원칙주의자이면서도 인품과 덕망으로 주위를 포용,격동의 반세기를 학원에서 보내면서 한결같은 존경과 신뢰를 쌓아왔다.
평남 개천의 유학자 짐안에서 태어나 평양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온 뒤 해방직후인 46년 고려대에서 첫 강의를 시작한 현 회장은 학생처장이었던 4·19때 『학생은 상아탑안에서 진리를 찾아야한다』는 원칙으로 최루탄과 돌이 난무하는 교문 앞에서 단신 학생들의 교문 밖 진출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팔을 뿌리치며 달려나가는 제자들의 옷자락을 잡고 『제발 몸조심하라』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두고두고 고려대 4·18세대의 화제로 남아있다.
현 회장은 또 한학생이 등록금을 못내 제적이 결정되자 『공부하겠다는 학생을 돈때문에 쫓아낸다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라고 이의를 제기,끝내 제적결정을 번복시키기로 했다.
스스로 고려대를 「마음의 고향」이라고 사랑해온 현 회장은 74년 성균관대 총장을 맡으면서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당시 고려대 총장으로 유력시되던 그가 학교를 떠난 것은 잦은 직언때문이라는 설도 나돌았다.
성균관대 총장 부임초기부터 캠퍼스 수원 이전문제 등을 놓고 학생과 학교·재단이 극심한 대립을 빚는 가운데 학교정상화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현 회장은 80년 3월 임기 7개월을 남기고 미련없이 총장직을 버렸다.
돌연한 사임이유에 대해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으나 훗날 현 회장은 「학생들의 무례」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고려대 평교수도 되돌아간 현 회장은 소원대로 84년 고려대에서 정년퇴임한 뒤 고보 동창인 윤덕선 한림대 이사장의 간청으로 신생 한림대의 기반조성을 돕고 89년 총장에 취임했다.
현 회장은 지난해 교총 회장 후보를 권유 받았을 때도 고사하다 『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주위의 설득명분에 응할 만큼 철저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해방전해인 44년 학도병으로 징집됐었던 현 회장은 6·25 발발직후인 51년 7월부터 55년 4월 공군중령으로 예편될 때까지 국방부인사 행정과장 등으로 국방행정을 익힌 경력이 있다. 또 자유당시절인 58년부터 3년여동안엔 월간 「사상계」의 편집위원과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맡아 언론인으로도 활약했다.
『나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여학생에게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느냐」고 물었더니 오빠라고 부르더라』며 좋아할 만큼 소탈한 구석도 있다.
부인 홍영표여사(71)와는 이미 2년전 금혼(50년)을 넘겨 해로하고 있다.
학문에서도 일가를 이룬 현 회장의 50년대 저서 「로마법개론」과 「서양 법제사」는 아직까지 경쟁서적이 없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주말마다 등산을 거르지 않는 현 회장이 평생을 지켜온 바른 원칙과 신념이 혼탁한 우리정치에 신선한 바람이 되기를 국민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총리직 제의를 받고 『일생에 지금처럼 괴로운 때가 없었다』며 고심해온 현 회장이 끝내 재상의 자리에 나가기로 한 것도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관리로 2세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교육자의 마음이 시대의 요구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김현수기자>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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