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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더 가까워진 2백만동포의 어제와 오늘⑥ 민족교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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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더 가까워진 2백만동포의 어제와 오늘⑥ 민족교육:상)

입력
1992.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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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자산” 향학열 끝이 없다/부모들은 자녀공부 뒷바라지에 사력/중국수재 모이는 북경대 진학땐 “잔치”/연변엔 민족대학 5개… 전통문화등 「뿌리찾기」 교육도92년 6월25일 연길에서는 동북조선민족교육과학연구소와 국제고려학회 교육분회 주최로 「조선족교육의 특점 및 전망」을 주제로 사흘간 연구토론회가 열렸다. 중국조선족 교육의 전반을 다룬 이 연구토론회에 참석한 연변대 등 10여개 기관의 교육전문가들은 2중언어,2중언어 교수로 인한 자연적 요인외에 진학 제일의 교육열,부적절한 교원의 교수학습방법 인위적 요소가 장애가 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특히 『진학유일의 교육관념부터 갱신하고 종합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진학제일의 교육열은 한국이나 연변이나 똑같다. 특히 중국조선족에게 교육이나 상급학교 진학은 사회적 신분상승을 보장해주는 최선의 유효한 수단이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 조선족은 최고의 교육수준을 자랑한다.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소수민족의 집거지역 가운데 교육·문화생활이 가장 발달한 곳으로 각급 학교를 고루 갖추고 있어 다른 민족들이 부러워하고 있다.

조선족 스스로도 그들의 장점중 첫번째로 교육열을 꼽고있다. 연변대 주칠성교수(58·조선문제연구소)는 교육수준이 높고 총명·근검한 것을 장점으로 꼽았다. 대학생 김철군(22·연변농학원 3학년)도 어떻게 해서든 자녀를 교육시키는 부모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연변농학원 학생중 절반이상이 한족이지만 조선족학생들이 더 우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논과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가르치는 교육열은 오늘날 중국의 각 민족 가운데 조선족을 가장 문맹률 낮은 민족이 되게 했다. 중국 전체의 문맹률(한자를 전혀 모르거나 5백자이내 해득자의 비율)이 15.9%나 되는데 비해 조선족의 문맹률은 10% 미만이다.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가 90년 4월 발간한 「중국조선족교육사」에 의하면 민족교육의 역사는 1백10년을 헤아린다. 1883년부터 조선이 주민들의 마을마다 글방이 설립되기 시작,오늘날과 같은 장족의 교육발전을 이루게 됐다.

이 책은 중국사회의 정치·역사적 변천과 전환시기를 근거로 ①9·18(1931년 만주사변) 이전 ②일제강점기 ③해방전쟁시기(1945년 8월∼1949년 9월) ④건국후 시기(1949년 10월∼1966년 5월) ⑤문화대혁명시기(1966년 6월∼1976년 9월) ⑥4대 현대화 추진시기(1976년 10월이후)로 교육시대사를 구분하고 있다.

초기 정착단계의 교육은 유교의 봉건윤리를 가르치기 위한 사숙과 서당으로 출발,첫 근대학교인 서전서숙(1906년 이상설이 용정촌에 설립) 등을 통한 반일민족문화 계몽운동을 거쳐 학교교육과 반일구국운동의 결합으로 발전돼갔다. 해방전쟁시기엔 사상개조·정치계몽을 위한 신민주주의 교육이 시작됐다. 경제건설을 위한 전문인재와 민족간부,수준높은 교원의 양성은 이 시대의 주요과제였다.

중공정권이 수립된 1949년 4월 중국 최초의 민족대학인 연변대가 개교했다. 「위대한 중국공산당 민족정책의 빛나는 구현이며 조선족교육의 발전사에 새 기원을 연 일」이었다.

1946년의 민주정부 공동 시정강령을 통해 소수민족의 언어 문화 종교 신앙을 존중할 것이 명시된 이후 52년엔 중공의 민족구역 자치실시 요강에 따라 연변 조선족 자치구(55년부터 자치주로 변경)가 성립되고 54년 9월 중공헌법이 「각 민족은 모두 자기의 언어문자를 사용하여 발전시킬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함에 따라 그해부터 한글교과서가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미 52년 당시에 조선족 어린이의 소학교 취학률은 90% 이상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시기에 민족교육은 전면적으로 파괴되고 질도 크게 저하되었다. 조선어 무용론이 채택됨에 따라 민족어문교육은 금지됐으며 많은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학교로 옮겨갔다. 연변대를 비롯한 민족학교들은 축소 또는 폐지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뒤 4인 무리가 축출되면서 농업 공업 국방 및 과학기술 등 이른바 4가지 현대화 달성 등 사회주의 강국건설을 위한 장기경제발전 개요가 발표되고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에 따른 개혁개방이 추진돼 민족교육은 만개하기 시작했다. 현재 인구 29만여명인 연길에 4년제 대학만 5개나 되며 1만명당 대학생수가 49년 당시 6명에서 26명으로 늘어났다.

또 93년 9월에는 국내외 동포들의 후원을 받아 한국 최초의 해외민족대학으로 건립중인 연변과학기술대(학장 김진경)가 연길에 개교할 예정이며 한중수교에 힘입은 한국의 교육지원으로 민족교육은 풍성해져갈 전망이다.

그러나 민족교육의 개념은 한국에서 흔히 생각하듯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이 아니라 소수민족이 자기민족을 대상으로,또는 중국의 교육당국이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교육을 일컫는 행정용어이다. 따라서 중국조선족의 민족교육도 교육이념이나 내용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돼있다.

어문교과서는 한글로 편찬돼 있으나 주제나 표현방식은 당연히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고 분단이후의 남한은 다루지않는 반면 북한에 관한 내용은 들어있다. 역사교과서는 중국의 교과서를 거의 그대로 번역,사용하고 있다.

모든 교과서와 교육과정은 모택동이 1958년 인민이 지녀야할 품격과 덕목으로 제시한 「우홍우전」에 따라 홍( red·사회주의 정치이념)과 전(expert,technocrat·전문지식과 기능연마)의 습득을 목표로 하도록 돼있다.

83년에 공포돼 시행중인 전일제 6년제 조선족 소학교의 교육과정에 의하면 역사는 6학년때 처음 주당 2시간을 배우나 그 내용은 중국사이다. 조선어는 1학년때 주당 12시간,2∼6학년에 주당 8∼7시간씩 배정돼있다.

또 연변대는 중국조선족의 자랑이긴 하지만 아직 고득점학생을 받아들일 수 있고 중앙정부의 예산지원을 받는 중점학교로 지정되진 못한 상태이다. 길림성의 중점대학은 연변대보다 역사가 짧은 길림대 길림공업대 장춘지질대 길림사범대 등 4개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중국당국이 교육지원면에서 조선족을 차별한다는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

연변에서 북경의 대학으로 진학하는 조선족 학생은 매년 30여명 정도. 중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북경대와 북경청화대 화공대 등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연변에서 큰 자랑거리이다. 연변 TV방송대의 교무처장 허병묵씨(56)도 연변2중(한족학교)을 나온 딸 영자양(23)이 88년에 북경화공대에 합격했을때교사들과 동네주민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벌였다. 허씨는 대학을 졸업한뒤 92년 9월 북경대대학원의 어려운 관문을 뚫고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는 딸을 늘 자랑스러워한다.

중국 교육당국은 조선족학생들이 한어문에 서투른 점을 배려,중국어로 대학입시를 치를 경우 10점의 가산점을 부여했었다. 그러나 87년부터 이 가산점이 5점으로 낮아지는 바람에 조선족의 명문대학 진학은 더 어려워진 실정이다.

□특별취재반

▲사회부:임철순차장 강진순기자

▲국제부:조상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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