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이승만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한 이틀뒤,그러니까 이 대통령이 경무대에서 이화장으로 옮긴 4월28일 초저녁.필자가 종로2가 파고다공원 앞을 지나가고 있을때 신문사 지프가 호외를 뿌리고 갔다. 호외를 들어보니 과도정부의 내각명단이었다. 주위에서 함께 들여다본 시민들이 『훌륭한 분들이군요. 아주 잘된 내각입니다』 『정말 이 정도면 됐군요…』라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역대정권이 숱한 조각·개각을 해왔지만 한번도 그때와 같이 『이 정도면 괜찮군요』라고 하는 평을 들은 일이 없다.
다음날 상오 중앙청에서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허정 과도정부 수반은 『…우리의 임무는 너무나 중차대하다. 우리 모두는 일사보국 일련탁생의 동지적 결합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학생들의 흘린 피에 보답하여 혼란수습과 함께 부정부패 없는 나라건설에 힘을 합치자』고 강조했다.
일주일뒤 허 수반은 전각료들과 함께 민의원(국회)에 출석,신임인사를 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짧고 임무는 막중하다. 3·15 부정선거 뒤처리와 20년간의 비정으로 마비된 국정수습과 질서회복 등… 우리는 단한점 사심없이 추상열일같은 단호한 자세로 임하겠다. 우리는 정당도 정치적 배경도 지원단체도 또 권력도 없는 무력한 존재지만 오직 국민만을 하늘처럼 믿고 일해 나갈 것이다』
「3개월 시한의 허정 과도내각」을 두고 일부에선 3·15 부정선거 처벌에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자유당정권 붕괴후 혼란을 수습하고 서정쇄신에 노력했으며 특히 철저한 중립적 선거관리(5대 총선)로 새정부를 탄생시킨후 깨끗이 물러났던 공적은 두고두고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노태우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하고 대선에 엄정중립과 중립내각구성 등을 천명한 9·18 선언을 한지 10여일이 지났다. 그동안 각당은 충격과 혼탁과 희열과 계산 등으로 바쁘게 술렁이다가 정신들을 가라앉힌 것 같다.
아무튼 9·18 선언이 지자제단체장 선거 불가와 관권개입 폭로 등으로 더욱 꽁꽁 얼어붙었던 정국을 푸는데 어느정도 해빙제가 된 것은 분명하며 또 「중립무드」 「중립정신」이 일파백파로 번져가 각계와 국민들의 마음을 어느정도 풀어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중립선언이 과연 교착정국을 푸는 최선의 처방이었을까. 우리의 정치체제가 대통령중심제대통령책임제임을 생각하면 뒷맛이 개운치 않다. 노 대통령은 지난 선거때 민정당 후보로 출마,민정당의 정책과 공약에 의해 당선됐고 3당 합당후에는 이른바 「새시대의 새정치」의 추구를 역설해왔던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9·18 선언 배경에 대해 청와대측은 대선을 공정하게 치르고 또 선거후 새정권에 대한 정통성 시비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책임정치와 정당정치의 정착이란 면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선례라고 볼 수 없다. 차라리 정당의 입김이 작용할 수 없는 기초단위 단체장선거를 실시하는 한편 대선때는 공무원의 엄정중립의지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9·18 선언에 대한 바른평가는 시간이 지난뒤에야 나올 것이다.
아무튼 내일 3당 대표들은 모임을 갖고 중립내각의 인선을 협의한다. 민자당은 총리 등 인선은 대통령에게 위임한다는 자세이고 당초 내각 총사퇴까지 기세좋게 주장했던 민주당은 「지나치다」는 여론에 밀려 안기부장 내무 법무장관 등은 반드시 바꿔야 하되 내각 인사권을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고 한걸음 후퇴했고 국민당은 총리까지 바꿀 필요없다는 식으로 서로 엇갈리고 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뉴욕회견 등을 보면 새내각의 인선은 총리를 비롯,선거관계 정치관계 장관들만 바꾼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3당 후보들의 인선 논의는 국무총리가 핵심이나 워낙 중립적이고 존경받는 원로가 드문게 우리의 현실인데다 자칫 추천후 훗날 「책임」을 감안하여 비정치적 경력과 무결격 등의 조건만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일임하게 되지 않을까 전망되고 있다.
아무려나 성공적인 중립선거내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가지 여건이 구비돼야 한다. 즉 총리와 선거관계장관에 진실로 중립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인사들이 기용돼야 하고 대통령은 조각후 그들에게 선거준비에서 관리,완료에 이르기까지 전행정권을 위임해야 하며 끝으로 모든 행정체제공무원들이 새 내각의 선거관리지침에 전폭 부응,중립적 자세를 견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구비되지 않고 그저 새중립내각이 병풍역,들러리역에 그치거나 또는 종래와 같은 대독총리선을 약간 넘는 수준이 되고 또 행정체제가 적극 호응하지 않을 경우 중립적인 선거관리의 실효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며 자칫 새로운 후유증만 남길 여지가 다분히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6공 정권이래 잦은 개각에 실망(?)하고 있는 노 대통령의 차원높은 「인사솜씨」를 고대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정말 이정도면 됐군요』라는 얘기를 또다시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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