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초 바로 이 난에 썼던 「밖에서 본 한국」 첫번째 칼럼이 생각난다. 주제는 「권력이동」 민자당안의 권력암투가 고조되어 세인의 관심을 끌던 때였다. 누가 선거에서 이기든간에 그것은 유권자가 결정할 문제지만,우리의 지리멸렬한 정치풍토에서 무엇인가 시원스러운 돌파구를 마련하려면,집권당안에 수혈된 개혁세력이 대통령후보가 되어 과감한 개혁구상을 펼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것이 주요 논지였다.그 뒤의 흐름은 대체로 이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만 우리의 경험은 또다른 이유로 인해 흥미진진한 「연속이행 모델」이 될 전망이다. 유사한 여건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때,재야 출신의 야당세력이 여당과 합류한뒤 짧은 시간안에 차기 권력후보의 지위를 확보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선거를 불과 3개월 앞두고 범여권의 핵심인 대통령이 집권당을 떠나 중립적인 선거관리내각을 구성한다는 것 또한 예사롭지 않고 전례가 드문 돌출현상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예로 당장 떠오르는 것은 브라질이다. 군사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피게이레도 장군은 우유부단한 성격탓도 있었으나 자신의 후임선정을 포함하여 선거과정에 엄격한 중립노선을 고수했다. 결과는 여당의 분열로 드러났다. 야당 후보 네베스와 여당 부총재 사이의 「미나스협약」이 이뤄져 결국 야당이 85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다. 더구나 이 선거는 간선이었다. 피게레이도 대통령은 엄정중립의 선거관리로 존경과 명예를 획득했다.
이번 「9·18 조치」의 결과가 어떠할지 속단하기는 아직 어렵다. 그러나 동기가 어떠하든간에 이번 조치는 내치에 관해 노태우대통령이 재임시에 내린 가장 중요한 결정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만큼 기대도 크지만 입장에 따라 불안과 의혹도 강할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 실체가 모호한 만큼 관망하는 입장도 있을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윗사람의 몇마디 말로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관료제안의 오래 타성과 관행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경쟁을 방해하는 온갖 유형의 공작·통제·지원·왜곡 등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결연한 후속조치가 체계적으로 따라오지 않는한 모처럼의 단안이 또 하나의 속임수로 전락할 위험마저 있지 않나 염려스럽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관료적 권위주의의 청산이란 큰 테마를 제시하고 싶다. 이 테마는 오늘날 여러 대륙의 민주화 경험,예컨대 남미·동아시아·동유럽·구 소련의 전환기를 이해하는데 다같이 중요하지만 특히 다음과 같은 우리의 절실한 과제에 보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법치의 보편성이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확립되어야 한다. 법을 통치수단으로 여겨 선별적으로 적용하는 잘못된 폐습이 권위주의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일반 서민에게는 법이 추상같이 적용되면서도 권력층에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국가기강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그의 권한과 임무는 초법적인 통치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을 가장 충실히 수행하는데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상식이다. 이와 배치되는 봉건유제,통치행위라는 이름으로 대통령의 권력남용을 무한정 정당화하려는 권위주의의 풍조에 쐐기를 박는 일이 긴요하다. 이렇게 보면 지자제선거의 해결방안은 저절로 자명해진다.
둘째,정규 행정부처 위에 군림하는 특수권력기구의 기능을 원래의 목적에 맞도록 대폭 축소 재조정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에서나 권위주의 청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개혁이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국회,정당 같은 의회제도와 법원,검찰 같은 사법제도가 자율성을 향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아직 이와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노 대통령의 권위주의 청산은 협소한 시각과 결단력의 부족으로 피상적인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비근한 예로 지난 총선에서 흑색 유인물을 돌리는 안기부 요원이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조직의 범죄에 하등의 메스를 가하지 못했다. 이런 결단력으로 어떻게 앞으로 공정한 선거관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셋째,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강제적 수단이 적시에 효과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행동이 따라오지 않으면 인플레와 함께 불신의 원인이 된다. 6공은 이 점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다. 얼마전 서둘러 종결된 관권 부정선거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요구된다. 이런 비상한 의지가 없이는 수십년간 지속된 관료제도의 타성을 극복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오늘날 진실로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 누가 이기느냐 보다는 어떤 발전이 구체적으로 이룩되느냐에 있다고 본다. 정당정치,관료체제,선거문화가 모두 개선될 필요가 있다. 민자당의 홀로서기가 특히 관심을 끈다. 김영삼후보는 이제야말로 권력 프리미엄에 연연해 하지 않고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구상을 마음껏 펴보일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고 할 수도 있다.
6공이 명백히 후기관료적 권위주의에 속한다면,12월의 선거로 열릴 미래는 탈권위주의 시대,즉 진정한 민주화시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요체는 다른데 있지 않다. 불공정한 제도와 관행을 모두 제거하면서 누구나 승복하는 자유경쟁의 원리를 정치에 본격 도입하는데 있다. 바라건대 여야는 이런 틀안에서 멋있는 정책개발과 토론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는 정당,대중적 경쟁력을 갖춘 정당으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지혜와 협력을 다하기를 기대한다.<서울대 교수·뉴욕 컬럼비아대에서>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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