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식」·「통일」로 체제논리 단속/비판없는 교육 「구호」만 가득차평양체류 3박4일간의 「감정체험」은 생생하고 강렬했다. 동시에 매우 복잡했다. 그 종류와 정도,흑은 뒤섞임의 여파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평양체류를 되짚어 보면서 그 복잡했던 감정들을 분노와 슬픔에 관한 것들로 정리했다.
그리고 이 분노와 슬픔은 대부분 북한 지도층의 체제관리,혹은 통치방식이 주민들에게 적용되는 과정을 관철하면서 얻게된 느낌이었다.
평양의 지도층은 동구 몰락이래 한중수교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속도의 주변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우선 체제단속의 강화를 선택한 것으로 여겨졌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우리식 사회주의」에 대한 「열렬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또 하찮은 일상잡사에까지 「통일을 위해」라는 어색한 수식어가 붙는 대화를 참아야 했다.
북한당국은 「우리식」과 「통일」이라는 두가지 주제로 체제관리의 논리를 더욱 강렬하고 단순하게 설정한 것 같았다.
평양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안내원은 대뜸 『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다 『교육일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아무말이 없었고,다음날 하오 우리 일행은 북한이 자랑하는 평양 제1고등중학교를 방문하게 됐다. 학생들은 음악 생물 물리실험 어학실습 수영연습 등 방과후의 소조활동(특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학습원리가 정치구호로 지배되고 있음은 운동장,현관에서부터 10층까지의 각 복도를 뒤덮고 있는 구호,교시로 금세 드러났다. 「생활도 학습도 항일유격대 식으로」 「혁명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자」. 「정치적 신념을 위해서라면 육체적 생명을 버려라」는 내용의 교시도 걸려있었다. 공작실의 한 학생은 김일성주석의 회고록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고 『수령님을 위해 모든 생명을 바치겠다』고 감상을 말했다. 우리 일행이 학교를 참관한 것은 처음인데,북측은 「우리식」을 고수하는 교육현장을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학교 참관에서 북한지도층의 「교육」 정책에 분노가 치밀었다는 사실을 북측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버스에 올라 「항일 유격대식」이란게 어떻게 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리띠 졸라매기란거 알디. 그것도 마찬가지야. 중국도 그렇고,경제건설도 해야하니까 정신차리자는 얘기디』 김일성대학 철학과 부교원이라는 그 역시 요즘 읽고 있는 책이 김일성 회고록이라고 했다. 이 회고록은 지난 4월15일 김 주석생일을 기해 출판됐다는 설명이다.
사회내부의 긴장분위기 지속은 외부와의 차단과 함께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숙소인 목란관에서 접할 수 있었던 TV 신문은 북한의 폐쇄성 재확인에 불과했다. 미리 「강습」을 받았을게 틀림없는 북한 안내원들은 남쪽 사정을 예상외로 몰라 놀랄 정도였다. 김 주석 회고록의 서문을 읽고 눈물이 글썽였다는 기자의 안내원은 『한국일보가 어디 소속인가』라고 물었다. 평양 제1고등중학교의 한 학생은 『남쪽 어린이의 30%가 굶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로 오는 버스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그거야,제도와 이념이 다르니까』 간단한 답이었다. 그러나 『선생이 우리 사정을 너무 몰라서 대화가 어려워. 안내를 하려면 어느정도는 알고 있어야지』라는 「주문」에는 『알았어』라고 소리를 낮추었다.
다른 북한인사는 비판이 없는 북한언론에 대해 『왜냐하면 비판은 인민대중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민들은 계속 교양을 시켜야해. 교양이 나쁜 심성을 키우게 되면 안되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인민교양은 「긍정감화」의 원칙으로 해야한다고 교시했어. 비판은 안좋아』
평양에서의 마지막날 저녁 만찬을 가졌던 목란관은 바닥과 벽과 천장이 백색 대리석으로 휘황찬란한 육각형의 연회전용 건물이었다. 규모와 호화로움,그리고 가수·무희들의 「자본주의적 몸짓」들은 상상을 넘어섰다. 3일간 평양시내와 외곽도시 남포거리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주민생활의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옆자리의 중앙방송 정치보도부장은 『부시(미 대통령)가 남북대화 진전이 빠른데 대해 남측에 우려한 것을 KBS를 통해 들었다』며 자주·통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목란관의 건축비가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서 안내원에게 물었으나 그 역시 같은 대답이다. 『국가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지었겠디』 호화로움에 놀란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목란관의 아파트군의 어두운 이면도로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도 말꼬리를 흐렸다.
개방·개혁이라는 흔한 말이 북한에서는 아직 「실종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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