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협정치논리 사이 갈등/「군사 선해결」 주장속 미·일에 손짓/“쇄국으론 망한다” 교시 자주 등장평양은 지금 「남방경협」의 과제와 힘겨운 씨름을 벌이는 중이다. 남한을 포함,미국 일본 등의 서방 자본유치가 북한에 얼마나 절실한지를 알기에 3박4일의 평양 일정은 부족하지 않다.
한중수교는 우리 북방외교에 대해 느끼던 북한의 부담감을 가중시킨 것 같다. 북한이 「남방경협」에 기울이는 관심들에서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평양에서 변화의 조짐을 발견하려 든다면 경협문제 언저리에서 항상 가능하다. 경협이란 말은 평양에서 만났던 북한 인사들에게 일반화돼 있었다. 그리고 경협의 대상은 남한이나 일본 미국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남쪽 사정에 밝은듯이 보이는 한 북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급자족이나 자력갱생이란 말이 남의 것을 받지 말라는 말이 아니야. 받는 것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적으냐의 문제라고 이해하면 돼』
그는 또 『남쪽이 경제문제를 강조하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우리가 김달현부총리를(남쪽에) 보낸 것을 과소평가하지 말아』
개성을 떠나 평양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안내원에게 북한 경제가 엉망이라는 전제를 충분히 깔고 이것저것 물어 보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전제를 충분히 알아들으면서도 한번도 이의를 달거나 다시 묻지 않았다.
그는 개성평양 고속도로가 아직 완공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이 고속도로는 원래 15㎝ 두께로 포장하도록 돼있지만 1단계 공사인 5㎝ 포장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다른 안내원은 『오래오래 다져져야 도로가 든든해지지』라고 부실공사 방지를 위한 의도가 있음을 주장했지만,『언제 완공될 수 있느냐』는 물음에는 묵묵부답이었다. 평양시내에 들어서 한눈에 들어오는 유경호텔은 북한당국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다 공사가 중단된채 이번에도 그대로이다.
이에 대해 한 안내원은 통일거리에 새로 짓고 있는 5만세대의 「살림집」(아파트)에 우선 주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낮의 건설현장에 일하는 사람은 안보였다.
어떤 이는 지난 56년 소련에 흐루시초프가 등장했을 때 북한에 대해 원조를 줄여 양국관계가 긴장됐을 당시 김일성주석이 내렸던 교시가 최근들어 자주 나온다고 전했다. 「대원군식의 쇄국정책으로는 나라가 망한다」는 교시라는 것이다.
평양사람들과 경제문제를 얘기할 때 그들에게서 위축된듯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남방경협 문제는 정치논리와 깊이 물려 있었다. 그리고 북한은 이 틈새에서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남북경협 문제를 얘기하던 만찬장의 한 북한인사는 기가 죽은듯하다가 갑가지 솟구쳤다. 『김우중도 좋고 남포도 좋지만 진짜 웃는 낯으로 하자구. 핵을 갖다놓고 총포를 겨누면서 교류하면 뭐해,동구도 변하고 다른 곳에선 평화공존 하지 않나』 교류협력을 강조하는 우리측에 대해 군사문제 선결을 주장하는 북측의 평소입장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경협의 문을 여는데 대한 「자기보호」 본능이 짙게 깔려있는 듯했다.
회담장에서 만난 한 북한기자는 『우리는 절대 거꾸러지지 않을 것』이라며 『누구에게나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 역시 군사문제의 비중을 강조하면서 『자기집에 불청객이 뛰어들 것을 알면서 문열어 놓고 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비유하기도 했다.
『남북 관계개선은 경제문제의 정책적 우선순위가 북한내부에서 어느정도 자리잡게 되는가의 문제와 밀접하다』는 한 전문가의 말은 평양에 머무는 동안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이 지금 미·일 관계개선에 열중하는 배경에는 남북사이의 정치·군사문제를 우회해 이들로부터 경제문제를 해소하려는 의도도 강하게 깔려있는 것 같았다.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안내원과 나눈 대화는 이런 추측을 가능케했다. 『남한과 미국 일본중 누가 가장 먼저 북한과 관계개선이 되겠어』
『그거야,같은 민족끼리 빨리 통일해야디』
『북쪽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 문제라면 어때』
『글쎄,남북한은 군사대치를 하고 있디만 미국이나 일본과는 우리끼리 만큼 대치하진 않잖아. 아마 미국이나 일본이겠디』
그는 김 주석이 일본과 수교를 빨리 하자고 촉구했던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몇시간뒤 대표단 일행은 평양 제1고등중학교를 방문했다. 북측은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를 외국어로 가르친다면서 유독 영어회화를 공부중인 어학실습실로 「안내」했다.
북한이 「남방경협」의 문제에서 정치논리를 어떻게 정제해낼지가 귀경길의 궁금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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