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연설을 한다. 국민을 향한 중대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그 내용은 당연히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담은 것이겠으나,그 뒤에 스피치 라이터가 있을 것은 당연한 짐작이다. 요즘처럼 매체가 발달하여,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말을 할 수가 있고,또 그렇게 할 계제가 잦다보면,대통령의 연설은 말할 것도 없고,그의 연설을 다듬는 스피치 라이터의 인선도 정사의 큰 몫을 차지한다고 할 수가 있다.
이점,89년 부시 대통령의 취임연설이 기억에 남는다. 요즘의 부시 대통령은 궁지에 몰려서 생기가 없어 보이나,4년전 그의 취임연설은 자못 신선하고 발랄했다.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정의인지를 압니다. 자유가 바로 정의인 것입니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역사의) 책장이 넘겨지고,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마치 한편의 시와 같다고 했던 이 연설문은 당시 38세이던 백악관의 여성 스피치 라이터 페기 누넌이 썼다. 그녀는 이 취임연설을 한 편을 쓰기 위해 유세길의 부시를 따라 전국을 누비며 그가 유권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말투,그의 가족관계까지를 살폈다고 한다. 명연설이란 결코 탁상 붓놀림의 소산이 아니더라는 얘기다. 말은 누가 다듬든 대통령의 연설은 대통령 자신의 모든 것을 반영할 때 의미가 있다는 얘기도 된다.
우리의 경우도 사정은 다를 것이 없다. 대통령의 연설은 「한 말씀」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노태우대통령 자신은 그 무게를 십분 즐기는 것 같고,연설에는 퍽 자신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의 연설을 누구가 썼느냐가 별 화제로 되지 않는다. 대통령 주변에 강팀의 스피치 라이터가 포진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말하기는 안됐지만,지난 4년여의 대통령 연설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대목이 무엇이더냐고 묻는다면,나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다.
다만 여기 예외가 있다면,재작년 10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대통령 연설에 쓰인 「특단의 조치」란 외마디 뿐이다.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으로도 범죄진압의 실효가 없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그 문맥으로 보아,「특단의 조치」가 「전쟁」 이상의 비상한 조치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특단」이란 말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왜 그 말투가 생소할까. 그래서 사전을 찾았으나,한자사전에는 이 말이 아예없다. 웬만한 우리말 사전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대신 일본말 사전에는,포켓판 작은 사건에까지 나와 있다. 역시 「특단의 조치」란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 아닐까.
이것이 「특단의 조치」란 말이 기억에 남은 까닭이다.
그러나,「특단의 조치」란 말 한다미를 천착하다가,나는 그말의 함축이 다른데 있음을 깨달았다. 「특단의 조치」란 말의 국적이야 어떻든,그 말이 바로 노 대통령의 리더십,또는 통치 스타일을 설명하는 열쇠말(key word)일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것은 노 대통령 특유의 이른바 수동적이며 체제유지적인 리더십과 관계된다. 그가 지닌 「물태우」와 「불태우」의 양면성과 관계된다고도 할 수가 있다.
벌써 익히 보아온대로,평소의 그는 무위무책인 것 같다. 그의 몸가짐과 표정에서 고뇌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떤 계제를 당했을 때,그의 변신은 재빠르다. 6·29가 그랬고,문익환목사 방북뒤의 공안정국이 그랬고,3당 합당이 그랬다. 느닷없었던 주택 2백만호 건설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그는 변신할 줄을 안다. 일이 막장에 이르면 「특단의 조치」를 한다. 지난 4년여는 이같은 「물」과 「불」의 기복으로 설명될 수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앞뒤가 꽉 막힌 정국을 보아서는,지금이야말로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할 때인 것 같다. 대통령 스스로도 「특단의 조치」를 구상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한구석의 기대도 없지는 않다.
지금 형편에서,노 대통령이 결단해야 할 「특단의 조치」는 그 초점이 내각을 어떻게 개편하느냐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특단의 조치」는 지자 단체장선거를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부연하면 단체장선거의 엄청난 부담과 어려움을 감내하느냐,아니면 단체장선거를 소신껏 연기하는 대신 그 때문에 있을 수도 있는 정기국회의 공전,어느 한편의 대선거부,그로 인한 후계정권의 정당성 시비까지를 감내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 둘 사이의 제3의 길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렇기에,분명 이것은 어려운 선택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것은 차악일 뿐 최선일 수가 없다. 그리고 더욱 분명하기는 이 선택이 대통령의 「특단의 조치」로만 가능하며,선택의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급한 심정으로 대통령 한사람을 쳐다볼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나라꼴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그가 고를 수 있는 차악이란 결국은 단체장선거의 연내 시행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당초의 선거연기를 찬성했던 민심 역시 단체장선거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쪽이든,이제 남은 것은 대통령의 결단 뿐이다. 다시한번 「특단의 조치」를 밝히는 대통령의 연설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연설이 일거에 정국을 수습할 수 있는 명연설이기를 기대한다. 벌써 예정이 잡혀있는,그대신 왜 그런 예정을 잡아야 했는지를 알 수가 없는,대통령의 세번째 유엔 연설 따위는 전혀 관심 밖이다.<상임고문>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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