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북방4도 줄다리기」37년/2차대전후 구영… 55년 첫 논의/소 개혁따라 「경원·반환」 본격화/제주도 3배 넓이… 세계 최대어장 경제가치 높아일본열도 북동쪽 끝머리에 위치한 에토루후(택착),시코탄(색단),하보마이(이누),구나시리(국후)란 이름의 4개 섬 총면적 4천9백96㎢. 제주도 넓이의 3배 가량되는 이 섬들이 최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일본방문을 취소시키고 러일 관계를 급속히 냉각시킨 문제의 「북방 4도」이다.
소련붕괴후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의 원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러시아와 원조를 미끼로 옛 영토를 되찾으려는 일본의 줄다리기의 대상인 북방 4도가 이제는 양국 민족주의 대결의 장으로 관심을 끌고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사할린주에 속한 이들 4개섬의 인구는 모두 2만4천8백명. 지난 47년 일본인들이 추방된 이후 거주민은 모두 러시아인이다. 아직 철도는 가설되지 않았지만 자동차 보급대수 8백여대,평균 월수입이나 생활수준은 러시아 본토보다 2배 이상 높은 「살기좋은 곳」이다.
영토로서 관심 밖이던 북방4도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분쟁대상이 된 것은 일본이 미국 폐리제독의 힘에 늘려 미일조약을 체결한 다음해인 1855년. 당시 러일 양국은 러일 통상수호 조약에 따라 북방 4개섬은 일본령,쿠릴열도는 러시아령,그리고 사할린은 양국민 혼재지역으로 결정했다.
이후 양국은 1875년 사할린쿠릴 교환조약을 체결,사할린 전체는 러시아로,쿠릴열도와 북방 4개섬은 일본으로 귀속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사할린 남부를 할양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참전한 소련은 1945년 얄타회담에서 참전대가로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물론 북방 4개섬을 요구,단 10분만에 북방 4개섬의 운명은 소련령으로 결정됐다. 이때부터 러일 양국의 영토분쟁은 본격화 된다.
전후 미국 등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은 쿠릴열도와 사할린은 포기하고 4개섬은 일본령임을 보장받았지만 소련은 이 조약에 조인하지 않고 반환을 거부하는 한편 47년부터는 4개섬에 살던 일본인들을 모두 내쫓고 소련화를 도모했다.
이들 섬에 대한 반환논의는 55년 소일 국교회복 때부터 시작됐다. 소련은 국교정상화에 따라 56년 공동성명을 통해 시코탄,하보마이 등 2개섬만의 반환을 제시했지만 일본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후 73년 당시 다나카 총리가 브레즈네프 서기장으로부터 영토문제를 「미해결 문제」로 인정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소련은 오히려 4개섬에 군대를 배치하는 등 강경입장을 고수,영토문제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4개섬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시작이었다. 양국은 88년 고르비의 방일을 계기로 이 문제를 중점 논의하기 시작했고 소련은 경제난 극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본의 경제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4개섬 반환의사를 여러 차례 시사해 왔다.
지난해 소련이 붕괴되고 경제난이 가중되자 러시아의 반환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고 판단한 일본은 원조의 조건으로 4개섬 반환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도 상당히 신축성있게 대처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옐친의 방일 취소후 러시아 내부에서 일고 있는 민족주의는 국가 자존심을 내세우며 4개섬 반환불가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어 「돈의 힘」을 빌려 이 섬들을 돌려받으려는 일본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이처럼 러 일 양국의 외교대립을 가져온 북방 4개섬의 전격적,경제적 가치는 대단하다. 4개섬에는 현재 지상군 1개 사단 8천명과 KGB소속 국경수비대 3천명이 주둔해 있고 미그 23전투기 40대,MI24 헬리콥터 10대,경비정 10척,대공미사일,탱크 등이 배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적으로도 주변해역은 천도해류와 일본해류가 만나는 세계최대 어장이다. 연어,송어,가재 등 고급 어종의 어획량은 일본 전체 어획량의 10%이상을 차지한다.<원일희기자>원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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