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족하진 못해도 체제 자부심/「순진한 행복감」엔 오히려 불안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은 감격도 두려움도 없었다. 분단의 한스러움을 가늠하며 벅찬 마음으로 가기란 60년대 중반에 태어나 전쟁을 모르고 자란 세대인 기자로서는 무리였다. 그저 약간의 호기심을 가지고 마치 다른 도시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가는듯한 기분으로 평양에 들어섰다.
평양은 촉촉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많은 숲에 둘러싸여 편안해 보였다. 우산을 쓰거나 비옷을 입고 걷는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띄고 차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러한 모습이 활기없거나 굳은 느낌을 주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조용하고 느긋한 기분으로 다가왔다.
남측 방북단 일행을 알아보고 그들은 손을 흔들어 줬다. 길가에 서있는 낡은 아파트에선 주민들이 베란다에 나와 웃음을 던지며 손짓했다. 열광은 없어도 따뜻한 환영이었다. 그들의 아파트 겉에 붙인 타일은 유치한 빛깔에 군데군데 떨어지고 더러워 누추해 보였지만 아기를 안은채 러닝셔츠 바람으로 서서 손을 흔드는 젊은 아버지들이나 작은 창으로 서로 길게 고개를 빼고 아는체하는 얼굴들의 꼬질꼬질함은 꾸밈이 없어 더 정다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초라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을 그다지 꺼리는 것 같지 않았다.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웃앞판에 수없이 구멍이 뚫린 남루한 차림의 노인을 만났다. 북한 최고의 호텔에서 그런 차림의 노인을 만난 것이 놀라웠다. 「평양이 저토로 가난한가」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평양은 남측 손님들에게 그들의 잘나고 못난 것을 그대로 다보여주자고 작정한 것 같았다. 그것은 이번 토론회에 대해 북한이 여느때보다 호의를 갖고 있다는 표시로 느껴졌고 그에 따른 믿음이 자신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솔직함으로 드러난 것으로 해석되었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도 남쪽 손님들에게 어떤 경계나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지않고 거리낌없이 반갑게 대해줬다.
북측은 남측을 자극할 만한 발언을 하지 않으려 애썼고 오히려 남측의 자극성 발언에 대해서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평양 이틀째인 2일부터 평양은 부산해졌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띄기 시작했고 모퉁이를 돌때마다 궤도전차,버스,승용차,트럭이 보였고 차속에는 사람들이 꽉차 있었다. 지하도를 건너는 사람들,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상점에서 줄을 선 사람들이 보이고 공원에는 사람들이 넘쳤다.
그동안 많은 방북기들을 통해 「북한은 이상한 나라」「평양은 쥐죽은 듯한 도시」라는 표현을 많이 보아온 기자로서는 활기찬 평양과 죽은듯한 도시인 평양중 어느쪽이 진짜 평양인지 어리둥절했다. 저들이 다 동원될 것일가. 적어도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어렴풋한 희망,약간의 흥분조차 녹아든 듯했다.
기자를 도와준 안내원은 『우리는 남의 도움없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만큼 건설했다. 우리가 넉넉하지 못하다는 건 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질 것이며 그리되려교 애쓰고 있다』는 말로 낙관과 자신감을 드러냈다. 평양시민이 모두 그런 기대를 공유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양은 조금씩 새로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통일 거리에서 그러한 느낌은 더욱 뚜렷해졌다. 북한이 최근 건설을 시작한 신시가지인 통일거리엔 아름답게 설계된 고층아파트가 늘어서고 곳곳에 건축현장이 널려 인구 3백만의 아담한 이 도시가 낡은 옷을 털고 일어서는 중임을 보여줬다.
방북단 일행은 『평양은 서울만은 못해도 나름대로 활기차고 명랑하다』는데 대체로 공감했다. 그러나 그러한 활력이 어디서 오는지,그것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를 궁금해했다. 『북한은 지금 경제사정이 나빠서 몹시 곤란하다는데 통일거리의 그많은 아파트는 다지을 수 있을까』 『평양 사람들의 낙관적인 표정은 현실의 토대가 없는 터무니없는 희망은 아닐까』하는 걱정들이 오갔다.
동구가 몰락하고 섹계가 급변하는 가운데 북한은 주민들에게 지금까지보다 한차원 높은 수준의 생활을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에 대해 지녀온 자부심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체제유지를 위한 몸부림이든 개혁을 향한 몸짓이든 상관없이 평양 시민들은 덕분에 행복해하는 표정을 짓는지 모른다. 걱정은 외부인들의 몫이었다. 그들의 모든 행복은 당과 수령이 담보하고 있으며 그들은 『당과 인민은 하나다』라고 철저히 믿으면서 『우리는 제일 행복하다』고 거듭 말했다.
그러나 당과 수령에 대해 특별한 믿음이 없는 우리 외부인들로서는 그들의 행복감과 자랑은 곧 깨질 희망처럼 보였다. 우리는 어느날 그들이 당과 수령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때 겪을 실망과 고통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깨끗하고 의심없는 희망은 그대로 순정이었다. 그러나 그 뒤편으론 「평양이외의 지역에선 당장 세끼밥을 못먹어 주민들이 김 부자를 욕한다더라」는 우울한 외신들이 흘러다닌다. 평양이 완전한 절망을 맛보는 일 없이 그들 체제의 굳어진 부분들을 들어내고 유연한 새집을 지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안타깝도록 간절했다.<오미환기자>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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