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3년에 일어났던 소련의 대한항공 007기 격추사건이 피해보상은 커녕 진상공개도 되지 않은채 벌써 9년이 흘렀다. 이제 북방외교도 중국과의 수교로까지 급진전되고 있는 판인데 2백69명의 생명을 무참히 앗아간 엄청난 사건이 한국과 러시아 양국간에 아직도 한치의 진전도 없이 여전히 미궁속에 빠져 있다는 것은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지금까지 소련이나 러시아가 취한 조치라고는 외무장관의 유감표명과 사건 8년만인 작년 사할린 해역에서 선상추모제를 지내도록 해준 것 뿐이다.
사건의 경위와 진상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인 언급은 언제나 조사되는대로 알려주겠다는게 고작이었지만 소련이 사라지고 러시아와 관계를 맺은 뒤에도 지금까지 묵묵부답이다. 우리는 그저 이즈베스티야와 같은 러시아신문이나 일본신문·TV를 통해 산발적으로 전해지는 사실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한국의 외교당국도 외국언론을 통해 사건의 일부가 보도될 때마다 마지못한듯 의례적으로 진상공개를 촉구하는 선에서 그쳐왔다.
격추당시 전투기 조종사가 처음으로 민간기인줄 알고 쏘았다는 증언을 일본 TV를 통해 했을 때도 그랬다. 여객기의 기체와 승객유품 잔해가 신문사진과 TV화면을 통해 우리에게 생생하게 나타났을 때도 그랬다.
작년 9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열쇠가 되는 블랙박스를 회수했다는 증언이 인양 잠수부의 입을 통해 나왔을 때도 「내용을 공개하라」는 한마디 성명이 대응책의 전부였다.
오랫동안 이 사건을 추적 보도해온 이즈베스티야는 9주년이 되는 1일 새로운 사실을 또 보도했다.
블랙박스의 내용을 모두 해독했으나 엄청난 배상금 걱정때문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신문에 따르면 최근 이 사건과 관련하여 대통령 평의회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사건내용 공개문제가 제기되자 유가족들에게 지불해야할 거액의 배상금 때문에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또 83년 9월2일 열렸던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당시 국방장관 우스티노프는 모든 사실과 숫자를 날조해서 보고했던 고르바초프는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서방에 대한 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이 보도에 대해 이번에도 외무부가 또다시 내용공개를 요구하는 성명 한장으로 대응하고 말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는 그런 형식적이고 미온적인 태도를 버리고 본격적으로 달려 들어여 할 때가 온것 같다. 때마침 오는 16일에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처음 서울에 온다니 그 기회에 진상규명과 아울러 보상대책이 시원하게 해결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옐친의 군사보좌관들은 지난 6월 이 사건에 관한 모든 자료를 한국측에 제공하겠다고 말한바 있기 때문에 결코 빈손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정상회담을 세번씩이나 하고 모스크바까지 정상외교를 다녀오면서도 고르바초프 한테서는 아무런 언질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옐친을 맞는 자리에서도 그냥 지나친다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이나 그 유가족은 물론 일반 국민감정까지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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