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코공화국의 36배… 7천㏊ 달해/주민 강력반발… 소유 일부포기·헐값 팔아/“통일이 봉건지주 되살렸다” 우려 소리도【베를린=강병태특파원】 구 동독의 한마을 전체를 서독의 전쟁전 지주가 되찾아 화제다.
통일후 최대규모인 이 부동산 소유권 회복사례는 자본주의 복귀에 따른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통일이 봉건지주를 되살렸다』는 원성과 우려도 적지 않다.
작센 안할트주 할레시 근교에 있는 인구 7백명의 잘츠뷘데마을은 넓고 비옥한 농지로 둘러싸여 있다. 이 일대는 전쟁전 칼 프리드리히 벤첼이란 대지주가 무려 7천㏊(약 2천1백만평)의 토지를 갖고 있던 곳이다.
칼 프리드리히 벤첼은 전쟁전 최대재벌 크루프에 비유돼 「독일 농업의 크루프」로 불렸다. 그는 주변농토는 물론 잘츠뷘데마을 자체를 소유했었다. 기차역과 도살장을 빼고는 주택 도로 마을사무소 묘지 방앗간 양조장 설탕공장 등 모든 것이 그의 소유였다. 이밖에도 그의 땅은 주변 25개 마을에 걸쳐 있었다. 1935년에 나온 그의 가문지는 『독일인의 1천명중 한 사람은 벤첼농토의 곡식으로 만든 빵을 먹고,1백80명중 한 사람은 벤첼의 설탕을 먹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당초 벤첼의 장손 칼슈테판 벤첼(48)이 90년 통일후 벤첼의 「영지」 7천㏊에 대한 소유권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동서독간의 통일조약에 의하면 벤첼가문 토지와 같이 동독정부 수립전인 45∼49년 소련군정이 국유화했던 대규모 토지는 반환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치 희생자유족에 대해서만은 예외적으로 반환청구권을 인정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고,벤첼가문이 바로 이에 해당됐다. 칼 프리드리히 벤첼은 44년 12월 반나치 쿠데타계획을 지원한 혐의로 처형된 나치 희생자였다. 이에 따라 칼 슈테판은 단 한페이지짜리 반환청구서만으로 당시에도 1억마르크(약 5백억원)로 평가된 방대한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 벤첼가문 토지는 모나코공국의 36배,리히텐슈타인의 절반크기로 「봉건영지의 재현」으로 비유될 정도다.
전후 벤첼의 유족들이 서독으로 이주한뒤 국유화됐던 토지의 절반가량은 그후 동독의 토지개혁으로 잘츠뷘데마을의 주민들인 과거 소작농들에게 분배됐다. 나머지는 「인민의 재산」으로 남아 있다가 통일후 독일정부의 신탁관리공사에 넘어갔었다.
잘츠뷘데마을 주민들은 농토는 물론 당장 살고 있는 집부터 내놓을 판이었다. 주민들중 1백여세대는 50년대 주택을 국가로부터 샀고,89년 호네커 정권붕괴후 대지를 1평방미터당 1마르크씩에 매입,처음으로 완전한 자기집을 가진 처지였다.
벤첼형제는 이 택지매매 계약마저 무효화시켜 통일후 시세로 다시 주민들에게 팔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자 주민들은 집단으로 반발,단체를 조직하고 여론에 호소하고 나섰다. 나이든 주민들은 『당신들의 할아버지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고 벤첼가문의 「명예」에 호소했다.
결국 지난 5월 벤첼형제는 마을축제에서 주택소유권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주택주변의 자투리 땅들은 헐값에 넘겨,그 돈으로 놀이터를 만들어 기증했다. 벤첼형제는 이를 자신들과 마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희생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벤첼형제는 모두 3천5백㏊의 토지를 갖게됐고,나머지 농민들이 전유한 땅에 대해서도 정부의 보상을 받게돼 있다. 이와 함께 벤첼형제는 주민들과 함께 잘츠뷘데일대의 개발을 추진하기로 합의,호텔 상가 체육관 등을 갖춘 3천세대 규모의 주택단지 건설에 착수했다.
주민들은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 일대에서 생산되는 밀을 원료로 하는 주정공장이 들어서는 등 과거의 「벤첼왕국」이 재현되고 있는 것과 관련,『다시 지주에게 예속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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