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르카는 스페인 사람들이 「지중해의 진주」라 부르는 섬이다. 바르셀로나에서 1백32해리 떨어진 발레아레스제도 중 가장 큰 섬으로 넓이가 제주도의 꼭 2배쯤 된다. 공항에 내리면 주항인 팔마까지는 15㎞. 섬은 올리브,아몬드,오렌지나무 등으로 덮였다. 팔마항에 서면 쇼팽이 이곳에 도착하자 편지에 쓴대로 「터키옥같은 하늘,청유리같은 바다,에메랄드같은 산들,천국같은 공기」가 가히 스페인이 자랑하는 관광휴양지답다.내가 연전에 마요르카에 간 것은 쇼팽을 찾아서였다.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은 연상의 애인이던 프랑스의 여류작가 조르주 상드와 함께 요양차 이 섬에 와서 1838년의 한겨울을 지냈다. 「빗방울」을 포함한 쇼팽의 전주곡들이 여기서 쓰여졌다.
쇼팽이 머물던 곳은 팔마에서 18㎞ 거리의 발데모사였다. 발데모사에는 언덕마을의 마루턱에 옛수도원 건물이 우뚝하다. 쇼팽은 그때 이미 폐쇄되어 텅비어 있던 이 수도원의 한 암실에 들어있었다. 12개의 암실은 지금도 남아 제각기 주인이 다른 살림집이다. 이중 2호와 4호의 두곳이 쇼팽기념관이 되어있다. 쇼팽이 살던 암실이 정확히 어느것인지 고증되지 않아 양쪽 주인이 저마다 자기집이라고 우기며 호객하는 것이다.
당시 발데모사의 주민들은 쇼팽이 폐결핵 환자인 것을 알고는 경원했다. 쇼팽은 비바람치는 섬의 겨울날씨가 병세를 더 악화시키기도 하여 결국 석달만에 섬을 떠나야 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계기로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선생에 대한 관심이 모아져 마요르카의 유가 보존 등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의 모금운동에 국민들이 크게 호응하고 있다.
마요르카에서 안익태선생의 이름을 들은 것은 우연히도 발데모사의 쇼팽기념관(4호) 주인한테서였다. 가브리엘 케트글라스라는 50대의 남자는 내가 한국인인줄을 알고는 자기 아버지가 안익태선생과 친구여서 선생이 이곳의 수도원에 와서 연주회를 연 적도 있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마요르카의 쇼팽은 안익태선생을 기억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안익태라면 1946년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요르카 오케스트라를 창단,지휘한 우리의 세계적 음악가다. 얼마전 스페인의 한 교포 독지가가 셋집이던 선생의 유가를 사재로 매입했고 이것이 기념관으로 꾸며질 계획이다. 유지비는 모금한 기금이 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유가를 보존하려는 것은 마요르카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애국가」를 선양하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먼나라 땅의 고도에서 안익태선생의 애국혼은 유배자처럼 언제까지나 고독해야 할 것인가.
영불해협에 위치한 영령의 섬 건지도에는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쓴 집이 정문에 프랑스 국기를 달고 프랑스 정부 소유의 기념관이 되어있다. 지중해의 섬에 태극기가 애국가 소리를 내며 휘날리는 집이 하나 있어 우리가 자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고는 프랑스 본토에 기념관이 두군데나 있고 나서다. 우리의 안익태선생도 기념관이 본국에 따로 있어야 한다.
한국에는 안익태선생의 지휘봉,육필악보 등 유품의 극히 일부가 독립기념관에 와있고 마요르카에서 가져온 피아노 한대는 국립극장의 한 구석에 처박혀 있다. 선생의 유해는 곡절끝에 1977년 환국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애국정신이 환국할 차례다. 평양태생인 그는 25세때인 1930년 도미유학을 떠난 이래 줄곧 세계무대만 누볐고 고국에는 연주여행만 왔기 때문에 국내에 안주의 집 한채 없다. 지금이라도 그의 기념관을 집으로 마련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 기념관이야말로 「애국가」를 모시는 사당이 될 것이다.
안익태선생은 1955년 25년만에 고국을 처음 찾아온 후로 몇차례의 귀국동안 국제음악제를 여는 등 우리 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그의 꿈은 한국에 세계수준의 교향악단을 창설하는 것이었고 천재음악도들의 자질을 대성시킬 음악원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 꿈들이 고국악단의 질시와 냉대와 돌팔매질에 무산된채 그는 실의를 안고 1965년 서울을 마지막 떠났고 몇달 후 그 울화병의 여파로 바르셀로나의 병원서 쓸쓸히 영면했다. 그는 한국땅에 영주하기를 희망했다. 이제라도 국민들의 열의로 그를 영주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쇼팽을 마요르카에서 쫓아낸 그런 몰이해에 「애국가」의 조국을 쫓겨난 안익태선생이었다. 국민음악을 일으켜 세우자는 열정이 폐결핵같은 악역이었던가. 그의 좌절로 우리의 음악은 적어도 20년은 낙후되었다. 결국 세계적 교향악단은 아직도 요원하고 음악의 영재교육은 이제 겨우 국립음악학원으로 결실되어간다.
쇼팽을 눈흘겨 보았던 발데모사에서는 1930년이래 매년 여름 쇼팽음악제를 열어 그를 추모한다. 이 땅에서는 해마다 9월16일 그의 기일이 돌아와도 「코리아 판타지」의 연주 하나 없다.
「애국가」를 추방한 우리 음악계의 상잔의 고질은 과연 지금 사라졌다 할 수 있는가. 국가의 기능은 밖으로는 나라의 독립성을 나타내고 안으로는 나라의 결속을 다지는데 있다. 우리는 애국가의 제창으로 흩어진 목청들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 마당으로 「애국가의 전당」이 필요하다. 우리국민들은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그에게 각자 저작권료를 바치는 마음으로 성금을 모아 그의 애국가정신을 길이 보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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