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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입력
1992.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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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26일­. 김일성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의 대세는 판가름 나는듯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파죽지세로 평양 원산 함흥 등을 점령한뒤 드디어 압록강변인 초산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군 6사단 7연대 장병들은 만주땅을 향해 「만세!」를 불렀고 수통에 강물을 담아 다음날 이승만대통령에게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10월19일 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병력 26만명은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 평북과 함남일대 산악지대에 포진했다. 이어 중공군제 40군 118사단은 한국군이 초산에 도착한 그날 유엔군을 처음 유엔군을 처음으로 공격,1천5백명을 전사케 한 것을 시발로 휴전때까지 연병력 2백30만명을 투입,괴멸한 북한군을 대신해 소위 인해전술로 한국군 유엔군과 혈전을 벌였다. 중공군의 참전은 실현될뻔 했던 통일의 꿈을 무산시킨 반면 지리멸렬된 김일성 집단을 구출,오늘의 김부자 왕조를 낳게 해주었다. ◆그로부터 42년,구적이었던 중국과 국교를 맺을 정도로 상황은 반전됐다. 하지만 과거의 정리·청산은 반드시 필요한 것. 그런데도 정부가 수교합의때 참전으로 「통일의 꿈」을 좌절케하고 고통을 주었던 중국으로부터 「사과」를 받지 못한 것은 실책이었다. 이상옥 외무장관은 수교협상과 정서 『사과표명이 있었다』고 한 반면 중국 외교부대변인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인하여 국민을 어리둥절케 하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국가적 체면을 고려,김일성의 범죄적 전쟁에 가담한 것에 대해 사과하기를 꺼리겠지만 우리는 그들의 정부성명이나 외교비망록 등으로 「사과기록」을 받았어야만 했던 것. 이는 단순한 과거집착이 아니라 「사과」를 통해 과거를 정리·청산한 뒤에야만 새로운 한중 관계가 튼튼하게 구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과를 분명히 받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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