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통신」문제로 빚어졌던 여권 핵심부의 갈등은 선경이 사업권을 자진반납키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일단 진정국면을 맞고 있다.정치권은 물론 온나라를 뒤끓게 했던 이동통신 문제가 비교적 빠르게 수습되게 된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 노출됐던 여권 핵심부의 갈등문제가 쉽사리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민자당 김영삼대표의 이른바 차별정책이 대선기간중 계속될 것이고,또 청와대쪽이 김 대표가 제기한 도덕성 문제에 대해 감정적인 응어리를 쉽게 풀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갈등문제는 해소가 아니라 내연할 뿐이다.
이와 더불어 노태우대통령의 도덕성문제도 깨끗이 씻어질 수만은 없는 것이고 오랫동안 그의 흠집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정권 이양기의 갈등현상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33대 트루먼 대통령과 34대 아아젠하워 대통령간에 빚어졌던 갈등을 들 수 있다.
미국 34대 대통령선거가 한창이던 52년 8월 트루먼은 아이젠하워 후보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이유는 국내외 정세에 관한 브리핑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을 우려,점잖게 거절했다. 화가난 트루먼은 다시 아이젠하워에게 편지를 썼다. 『백악관 초청을 거절한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당신은 큰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 잘못이 이 위대한 공화국(미국)에 상처를 주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아이젠하워가 발끈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2차대전의 영웅인 그에게 자신의 행동이 미국을 해치게 될 것이라는 트루먼의 말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두사람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돼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당선자격으로 한국전을 시찰하려 했을 때 트루먼이 대통령 전용기 사용을 제의했으나 이를 보기좋게 거절할 정도였다.
39대 대통령 카터와 40대 대통령 레이건의 관계도 거의 비슷했다. 이들 두사람간의 관계도 비록 얼굴을 맞대고 붉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트루먼아이젠하워의 관계 못지 않게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카터는 자신의 회고록에 적고 있다.
정권이양기 전임자와 후임자간의 갈등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지금 우리 정국을 강타한 「노김 갈등」은 그 성격과 내용에 있어 전혀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다.
트루먼아이젠하워,카터레이건간의 갈등은 어떻게 보면 공화당과 민주당간에 정권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노김 갈등」은 같은 집권당내에서 세력다툼과 비슷한 양상을 띠며 빚어졌다. 그래서 더욱 희화적인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비쳐지고 있다.
또 미국 전·후 대통령간의 갈등관계가 노선이나 정책,정권이양의 절차문제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노김의 경우는 도덕성을 두고 빚어졌다는 점이 다르다. 도덕성은 바로 지도자가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고 있는 대목이다.
도덕성에 대해 국어대사전은 『…자기의 행위 또는 품성을 자기의 양심내지 사회적 규범으로써 자제하며…』라고 풀이하고 있다.
자기의 행위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사회적 규범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면 거두어 들이는 것이 바로 「도덕」이라는 뜻일게다.
이동통신 사업자선정에 하등의 하자가 없다고 해도 그것이 친인척과 관련된 것이라면 해서는 안되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 규범이며 가치관이다.
더구나 5공의 친인척 비리와 그에 따른 청문회까지 경험한 것이 우리 사회다.
노 대통령이 88년 2월 취임사에서 『과거는 반성의 거울이지 족소는 아니다』고 했을 때,그 포괄적인 함의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에는 친인척 비리배제의 뜻도 강하게 담겨져 있는 것으로 여겨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던 기억이 우리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로부터 5년이 다가오는 지금 또다시 대통령의 친인척과 관련된 문제로 우리 사회가 온통 홍역을 앓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도덕적인 뿌리가 얼마나 엷은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선경의 「이동통신」 자진반납으로 「노김 갈등」이 일단 진정된다고 해도 노 대통령이 입은 도덕성의 상처와 정부가 입은 신뢰성의 훼손은 쉽게 아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 상처를 하루속히 아물어들게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자신이나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국민에게 분명한 해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바로 국민을 아끼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 내년 2월이면 3명의 생존 전직 대통령을 갖게 된다. 그만큼 민주주의 두께가 두꺼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께만으로 민주주의의 축적이 계량될 수는 없다. 퇴임후에도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전직 대통령이 많아야만 그 두께의 의미가 커지는 것이다.<편집국장대리>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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