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도 자긍심으로 산다”/의병장 순국·비밀결사 등/가세 기울고 교육 못받아/부친은 건국포장… 유족연금은 없어경기 수원시 권선구 고등동 롯데아파트 1동 208호에 사는 독립운동가의 후예 임주수씨(67)가 47주년 광복절을 맞는 감회는 남다르다. 충남 천원군 독립기념관에서 거행되는 선친 임수명선생(77년 작고)에게 추서되는 건국포장을 대신 받게되는 임씨의 집안은 선조 3대가 독립유공자이다.
증조부 임병찬선생(1851∼1916년)은 한말 최익현선생과 의병을 함께 일으켰던 의병장으로 지난 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최익현선생과 대마도에서 2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증조부는 1913년 고종 황제의 밀령을 받고 전라도에서 의병을 조직했다.
그러나 모병사실이 일경에 발각되고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국권반환 요구서를 보낸 혐의로 거문도로 다시 유배돼 그곳에서 6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조부 임응철선생(1871년∼1942년)은 부친의 의병활동에 가담하면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난해 8월 비밀결사대인 「조선독립대동단」을 조직했다.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을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로 했다.
임수명선생은 부친이 조직한 「조선독립대동단」의 전북 익산군 책임자로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는 바람에 가세는 풍비박산됐다.
77년 선친이 작고한뒤 임씨는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아 독립유공자 기준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다 이번에 뒤늦게 인정받게 됐다.
임씨는 『물질에 욕심내지 말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라』는 조부와 선친의 유언에 따라 가난하지만 독립유공자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일제때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보통학교 교장이 추천서를 써주지 않아 중학교에도 못가고 독학을 해야만 했다. 임씨는 어린시절 주위사람들이 『증조부가 유배지인 거문도에서 돌아가셨을때 섬사람들이 1백년 넘은 은행나무로 관을 만들어 고향인 정읍까지 1백10일동안 운구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임씨는 독립운동가의 후예답게 해방직후에는 반탁운동에 가담했다.
지난 59년 정읍에서 상경해서는 전매청의 말단직원으로 10여년 근무하기도한 임씨는 2남1녀 등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야채 리어카상 막노동을 해야만 했다.
10여년 전에는 교통사고로 발까지 다쳐 그나마 일을 못하고 있다.
임씨는 『생활이 너무 쪼들릴 때는 독립운동 유공자 집안에 대해 이 사회가 너무 푸대접한다고 원망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교회에 나가 믿음을 가진뒤부터는 어떠한 부귀영화도 바꿀 수 없는 뼈대 있는 집안에 대한 긍지하나로 여생을 마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3대가 독립운동을 했는데도 임씨에게는 연금혜택이 주어지지 않아 아파트 월세방에서 장남 신탁씨(38)가 요리기구 영업사원으로 받는 적은 월급으로 부인 이지순씨(64)와 근근이 살고 있다.
선친에게 추서되는 포장이 건국포장이서 유족연금 대상에서 제외될 뿐 아니라 정읍의 선친 묘소를 다른 유공자 집안처럼 국립묘지에 안장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임씨는 『이제까지도 자긍심 하나로 살아왔다』며 이번 추석때는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 영전에 건국포장을 바치겠다고 밝게 웃었다.
임씨의 나머지 소망은 의병장이었던 증조부의 의병시절 일기를 모은 유고집 「돈헌유고」를 출판하는 일이다.<수원=권혁범기자>수원=권혁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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