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행진곡을 울리며 올림픽 선수단이 돌아왔다. 메달리스트들의 환한 언굴이 자랑스럽다. 잔치상이 조금도 아깝지가 않다. 흥에 겨우면 덩실덩실 춤을 추는게 우리네 오랜 정서가 아닌가. 올림픽선수단의 개선은 그만큼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찼다.이 가운데 한가지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다. 열과 냉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승부의 세계란 본디 냉혹하다고 하나,메달에만 지나치게 집착한 환영행사였다. 참가의 의미가 이미 퇴색했다고 한들 이럴 수가 없는 일이다. 환영의 뒤끝이 개운치가 않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그리고 해단식을 베푼 과정에서 TV방송은 현장중계로 감격을 되새겼다. 그만하면 족하다. 감격의 순간도 반복되면 식상하게 마련이다. 방송사는 똑같은 장면을 거푸 내보내면서 영광의 순간을 오히려 지겹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선수들도 피곤하고 국민도 감동이 시들해졌다.
방송사는 이 마당에 한술 더 떳다. 큰일이 생기면 흥분하는 것이 방송언론이라고 하지만,이것을 쥐어 짜는 버릇을 버리지 않았다. 환영행사라는 명목으로 개선한 선수들을 쇼 마당으로 유도한 것이다. 고국땅을 밟은 선수들의 소망은 가족과의 만남과 휴식이었을줄 안다. 그들을 오랜 시간 붙잡아 두고 방송프로의 출연자로 슬그머니 등장시킨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TV방송은 시청자를 편안하게 하는게 기본 자세임을 잊은 것 같다. 흥겹고 신바람 나는 일은 억지가 통하지 않는다. 메달리스트는 그렇다쳐도 메달이 없는 선수들에게 고역을 강요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답답할 따름이다. 피로한 선수들을 들러리로 세웠다는 핀잔을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 깊다.
그렇잖아도 올림픽 기간에 중복과 반복 방송으로 호된 비난의 표적이 된 것이 TV방송이다. 어찌하여 그런 질책이 따랐는가. 까닭은 간단하다. 방송의 윤리성과 사회성의 결여 탓이다. 위안과 개선의 잔치프로는 얼마든지 시간을 두고 베풀 수 있었을 것이다. 성급한 경쟁심이 선수들과 시청자들의 분노를 유발했다고 해도 달리 해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윤리성을 상실한 전파는 호소력을 잃는다. 사회의 공감을 얻기가 어려움은 당연할 따름이다. 방송의 독선과 독단은 더이상 용납할 수가 없다. 쥐어짜는 프로의 제작은 자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국민적 감동이 더이상 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 기회에 방송윤리의 고양과 사회적 책임의 막중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방송의 신뢰감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방송문화의 성숙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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