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천5백만년전쯤 이 지구상에서 공룡이 사라졌다.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각가지 「설」이 많다. 기후의 대변동,혜성과의 충돌 등 그 갈래도 무척 다양하다.그러나 고생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공룡 멸종에 대한 설명은 퍽 성서적이었다. 공룡은 몸집이 너무 커서 노아의 방주를 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아의 방주는 얼마나 컸을까. 창세기에는 방주 만드는 법과 규모가 자세하다. 요즘 새로 번역된 성경은,아예 원전에 나오는 단위를 확산해서,길이 1백35m,너비 22.5m,높이 13.5m라 밝히고 있다. 꽤 크지만 역시 공룡은 못 태울 것도 같다.
성경에 보면 방주안은 3층이며,간막이(선실)를 했다. 그러면 방주의 간막이는 몇이나 있었을까.
이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대영백과사전 초판(1768)에 의하면 그 해답은 72실(동물 36실·조류 36실)이다. 방주의 선실이 3백∼4백개는 되었으리란 그때까지의 통념을 깬 것이다. 방주를 탄 노아의 가족 여덟이 어떻게 그 많은 방을 관리했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들어서는 아무래도 우스개 같은 애기다. 성경에 없는 해답을 추리해 냈다는 점에서 비성서적이다. 관념의 유희,숫자 놀음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성경을 둘러싼 숫자놀음은 예전 일만이 아니다. 놀음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고 치자.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것은 언제 일인가.
이 물음의 해답 역시 성경에는 없다. 그러나 없는 해답을 찾는 것이 숫자놀음이다. 구약의 연대를 자세히 따져 봤더니 기원전 4013년에 천지창조가 이뤄졌더라는 따위다. 더 정확하게는 「기원전 4004년 10월23일 상오 9시」란 계산도 있다. 연도가 약간 다르지만 기원전 4000년대라는 점이 일치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역시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고 치자. 하나님은 세상을 엿새동안에 창조하시고 이레되던 날 안식하셨다. 그 뜻은 무엇인가.
물론 성경에는 해답이 없는 물음이지만,명쾌한 대답이 돌아온다.
성경에 보면,하늘의 하루는 땅위의 천년 같다는 구절이 보인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6+1,7천년으로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4천년,기원후 2천년이 지나서 세상은 끝이 나고 「천년왕국」이 온다. 묵시록을 상고한 즉,세상이 끝나기전 7년의 대환란이 있으며 환란이 오기직전 「믿는 자」만이 하늘로 들어 올림(휴거)을 받아 살아 남는다.
여기 등장하는 것이 「대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다. 그는 1999년 7월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했다. 「창조계획」과 바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7년전을 올 92년이 환란이 시작되는 해,휴거의 해다. 제만사하고 예비해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
이것이 요즘 시끄러운 시한부 종말론의 구조다. 오는 10월28일 자정이 바로 그 휴거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이 D80,휴거까지는 80일 남아있다는 계산이다.
참으로 허황한 얘기다. 웃어 넘기면 그만일 것도 같다. 그러나 허황한 애기가 이처럼 크게 번지고 있음은 예사롭지가 않다.
지금의 종말론을 주도하고 있는 집단은 그 신자가 공칭 10만,줄잡아 2만이며,그중 5천명이 광신도라고 한다. 이밖에 40여개의 독립된 종말론 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생업 또는 학업포기,그로 인한 가정파탄이 속출하고 있음은 보도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으나,10월28일 시한이 지난뒤에 벌어질 사태 또한 걱정이다. 32명의 떼죽음을 기록한 오대양사건이 다시 없으란 법은 없다.
그러면 왜 이렇게 종말론이 번질까. 많은 사람이 그 원인으로 최근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도덕성의 위기,공동체의 파괴,무력감·절망감을 꼽는다. 사교적 종말론은 병든 사회가 피워 낸 「악의 꽃」이라는 것이다. 다 옳은 지적이다. 아울러 병든 사회의 종교적인 갈증을 제대로 수용하고 간수하지 못하는 교회의 책임도 꼽으면 지적은 완벽할 것이다.
그러나 지적만으로,세상 돌아감 새를 나무라는 것만으로는,뒤끝이 공허할 수 밖에 없다. 대증요법에 그치더라도 대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대책의 첫째는 종교법제의 정비다. 종교의 자유가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종교가 법 밖에 있을 수는 없으며,종교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종교입법은 필요한 것이다. 종교단체의 등록을 규정하는 일본의 종교법인법,그에 따른 종교심의회,교역자 사칭 등의 처벌을 규정한 독일의 교회법 등이 참고가 된다.
다음은 아무리 종교단체라도 그 반사회성은 강력하게 단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66년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일본 창가학회를 반국가·반민족적인 정치단체로 규정했던 대법원 판례,헌금액의 다과로 신앙을 판단한다고 했던 박태선장로의 사기죄를 확정했던 대법원 판례 등이 그 선례다. 먼저 지금 종말론 집단의 실태조사가 앞서야 한다.
셋째는 사교적인 집단이 늘 권력을 업는다는 특성을 경계하는 일이다. 성금이나,체제옹호 활동,개인적인 연줄잡기가 그 수법이다. 오대양사건의 세모가 그 전형이지만,지금 성황을 이루고 있는 어떤 종말론 집단에 가면,교주가 권력 핵심자의 가까운 친척과 찍은 사진을 볼 수가 있고,현직 국회의원의 이름도 들을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도 권력은 몸조심을 해야 하고,혹시라도 이들을 이용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끝으로 종교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접근이다. 예컨대 사교집단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한 상담이나,역세뇌는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통일교 대책으로 학자들이 참여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이를 위해서 종교·사회·교육·심리학자들이 협동하는 체제의 마련이 있어야 할 것이다.<상임고문>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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