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동원령… 노예사냥식 납치/면장책임 아래 “취업” 속여 징발/짐짝 취급… 가혹행위 사망 많아▷실태◁
▲군대 위안소 설치=일본군은 만주 침략후 점령지역에서 일본군의 강간사건 빈발로 현지 주민의 격렬한 반발이 초래되고 성병의 만연으로 군전력 유지에 박대한 차질이 발생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1932년께부터 군대 위안부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남경대학살을 계기로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군대전속의 위안부 집단을 본격적으로 만들어 운영했다.
이후 일본군은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기보다는 경영은 매춘업자에게 맡기고 군은 위안소의 위생관리 및 규율,기타를 감독했다. 업자는 군대의 허가를 얻어 위안소를 개설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들 매춘업자들이 1차적인 인적관리 역할을 위탁받은 정도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군이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
▲모집방법=일본군은 남경대학살 사건이후 군대 위안부 수요가 급증하자 일본내에서의 위안부 대량모집에 따른 사회문제화를 우려해 주로 일본의 식민통치하에 있었던 한국에서 위안부대상을 충원했다. 특히 일본군과 위안부 업자들은 전력상실의 원인이 되는 성병예방을 위해 매춘 경험이 없는 한국의 젊은 여성을 위안부로 많이 끌어 들였다. 대체로 1938년까지는 주로 도시지역에서 여공모집,식당종업원 모집 등을 구실로 인신매매 수법을 통해 모집했으나 1938년이후 1940년께까지는 매춘업자가 군의 허가하에 헌병 경찰 면장 등의 도움을 얻어 주로 농촌지역 빈농의 딸들을 특지 간호부,군 간호보조원 등의 명목으로 모집했다.
이때 경관이나 면장이 동행,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1941년이후는 총독부가 도·군·면에 위안부 동원명령을 은밀히 하달,면장의 책임하에 군부대 잡역·간호보조·군수공장 여공·여자특수군속 근무로 속여 동원했다. 일제는 한국 미혼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할 것을 신문·라디오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고 은밀히 시행했다. 그러나 이와같은 방법으로 모집·동원된 미혼여성들이 위안부 생활을 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이같은 수법이 통하지 않게되자 43년께부터는 19세기 아프리카에서의 흑인노예 사냥과 비슷한 수법의 사람사냥으로 위안부를 충원하기도 했다.
군대 위안부와 정신대는 명백히 개념이 다르나 당시 군대위안부에 관한 사항은 극비였고 이에대한 말은 유언비어죄에 해당하는 상황이어서 일반적으로 한국민들은 군대위안부를 정신대라는 단어로 이해했다.
▲수송·배치=인신매매와 같은 사술적 수법에 의한 경우는 업자가 여관 같은 곳에 감금했다가 인원이 차면 끌고갔다. 중일전쟁이후 대량동원시기에는 경찰·군대·행정기관의 유기적 협조하에 빈창고·요정건물·군부대창고 등에 집합시켰다 수송했고 집결지는 주로 서울·부산 이었다.
위안부는 화물로 취급돼 군병참부의 책임하에 군용 화물열차나 군수송선으로 목적지에 수송됐다. 당시에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어디나 위안부가 배치되었으며 버마에서는 일본인 위안부들은 후방에,한국인 위안부들은 일선쪽에 배치됐다.
▲위안소 관리=위안소 건물은 군이 마련했다. 1938년께까지는 군이 직접 위안소와 위안부를 관리했으나 그 이후는 형식적으로 업자에게 맡겼다. 그러나 업자의 역할을 군대의 지시사항을 실행하는 역할이었으며 기능상 군속과 비슷했다. 위안부들은 외출이 제한되었으며 탈출을 막기위해 엄중한 감시가 이루어졌다.
▲전쟁 말기상황=일본군은 패주시 종군간호부와 위안부를 미리 소개시킨 경우가 있었으나 이 경우도 소개대상은 일본인 이었으며 한국 위안부들에게는 철수 사실을 알리지 않아 폭격 등으로 사망자가 상당수 있었다. 특히 태평양지역 전선에서는 대부분의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버림받고 치열한 전투와중에 사망했다.
▲귀환=미군 점령지의 군대위안부들은 미 군정당국의 수용되었다가 군정 당국의 주선으로 수송선을 타고 귀환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키나와의 경우,류큐열도 지역 및 오키나와의 한국인 위안부들을 「치안에 문제」가 된다는 이유로 한데 모아 한국으로 귀환시켰음을 보고하는 내용의 오키나와 주둔군 당국문서가 있다.
중국에서는 상해·항주 등에 모여 군정당국이 주선한 수송선으로 귀환한 예가 있으며 만주 등지에서는 육로로 귀환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위안부들은 언어소통의 문제와 여자인 점 등으로 인해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추정된다.
또 수치심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키나와 태국 베트남 대만 등지에 남은 경우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는 일본으로 갔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전력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했어도 대부분 임신이 불가능했고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경우가 많았다. 전 위안부 대부분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빈한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으로 보인다.
▷증언사례◁
▲38년 9월께 왜경의 놋그릇 상납거절 및 창씨개명 반대이유로 가족이 경찰서로 연행됐는데 이장이 애국 봉사대에 지원하면 아버지가 석방될 수 있다고 하여 지원,그 길로 자카르타에 위아부로 끌려갔다.
▲43년 1월 혼자 집을 보던중 신체건장한 남자 2명에 의해 강제로 만주 하얼빈에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했다. 1일 평균 20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으며 한국말을 하거나 남자받기를 거부하면 구타를 당했다.
▲43년 9월 부산지역 앞에서 일경에 강제연행돼 경찰서에서 대기후 배편으로 오사카로 이송됐다. 위안부 생활이 곤욕스러워 탈출하다가 붙잡혀 모진 매를 맞았으며 상처를 치료받지 못한 상태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40년 9월 일본 순사가 와서 출동하지 않으면 가족 모두를 찔러 죽인다고 위협해,오사카 근방으로 연행되었으며 3일후부터 1일 5∼7명 군인을 접대했다.
▲38년 4월 산에서 동생과 나물을 캐던중 일본군 2명과 한국인 1명에 의해 강제연행돼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수용소 생활중 심한 구타와 고통스런 생활로 정신분열 증세가 심해 일본 군인들이 산에다 내다버린 기억도 있다.
▲37년 4월 일본인이 설탕공장이라고해서 속아 현지에 도착해 군위안소임을 알게됐다. 남양군도 파우라섬 등 여러 섬으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했다.
▲38년 12월 집에서 군인 20여명이 총검을 들고 위협,강제로 군용트럭에 실려 끌려갔다.
영산포 소재 창고에 있는 15명과 나주에서 온 15명의 여자들과 합류,열차로 신의주·만주를 거쳐 천진주둔 일본군 히노마루 부대에 도착했다. 15명씩 한조를 이루어 가마니로 칸을 만든 가건물 속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는데 수치와 고통을 참지못해 목을 매거나 도망치다 총에 맞아 죽는 여자도 있었다.
44년 9월 방직공장에서 야간조업중 무장한 일본군이 15명 정도가 들어와 일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게 될 것이라고해 미리 눈치챈 사람들은 도망가고 49명만 연행됐다. 요코하마와 히로시마에서 군부대 위안부로 10여년간 있었는데 1개소대 50명으로 편성,5백명이 생활했다.<이계성기자>이계성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