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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 포함 12명 중국 길림성서 무덤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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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 포함 12명 중국 길림성서 무덤 찾아

입력
1992.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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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 떠나 숨져간 종군위안부 “원혼달래기”/만주서 첫 한·일 합동 위령제/산속 망가진 봉분 잡초만 무성/한국쌀 등으로 제단… 봉선화도 심어/일군 출신 70대 참회의 사죄문 낭독【동경=문창재특파원】 『종군위안부가 없는 저 세상에서 부디 편히 잠드소서』

옛 만주땅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한국출신 종군위안부들의 원혼을 달래는 한일 합동위령제가 해방후 처음으로 열렸다.

한국동란 42주년인 지난달 25일 하오 2시,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이 가까운 중국 길림성 동녕시 인근 석문자마을의 산중턱. 잡목이 우거져 봉분의 형태마저 알아보기 어려운 퇴락한 무덤앞에 한국인 일본인 12명이 꿇어 앉아 차례로 술을 붓고 큰 절을 올렸다.

제사를 올린 사람은 한국정신대문제협의회 윤정옥회장,「종군위안부문제 우리 여성네크워크」 회원 김영희씨(40·동경·치과의사) 등 재일 한국인 4명,「옛 병사들의 증언­종군위안부」 저자 니시노 루미코씨(서야유미자·39·여) 등 일본인 7명이었다.

이들은 지난 6월19일부터 11일간 중국 동북부지방을 돌며 종군위안부 족적을 찾아 헤맨 조사활동중 관계자들의 증언에 나오는 묘지를 찾는데 성공했다.

잡초위에 종이를 깔고 윤 대표가 한국에서 가져간 쌀과 사과 도마토 바나나 등으로 조촐한 제단을 만들었다. 제사는 잡귀를 쫓는 소금뿌리기로 시작돼 재일동포 사진작가 배소씨(35)가 『이승에서의 원한을 풀고 편히 잠드시라』고 명복을 빌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합창에 이어 조사단 전원의 이름으로 된 고사문이 낭독되었다.

고사문을 불사른 뒤에는 한 사람씩 무덤앞에 무릎끓고 술을 따르고 분향재배. 그뒤 옛 일본군 병사출신 모토야마 도시미씨(원산준미·72)가 일본인으로서 사죄의 뜻을 담을 글을 낭독하고 헌화·분향했다.

「봉선화」 「도라지타령」 합창에 이어 한국에서 가져간 흙에 봉선화씨를 심었다.

『정신대 세대인 저는 여기 잠든 이들이 쌀밥먹기가 소원이었음을 알기에 한국에서 가장 좋은 쌀을 가져왔습니다.

물도 우리집 샘에서 나오는 정갈한 천연수지요. 봉숭아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윤 대표는 고국의 흙과 쌀 물 봉숭아를 가져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무덤은 석문자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 포병대 출신 마스야마씨(증산장삼·71·가명)의 증언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조사단원 니시노씨의 저서 「옛 병사들의 증언­종군위안부」에서 1941년부터 45년까지 이 지역 위안소에 끌려온 한국출신 위안부들이 무수히 죽어 산속에 가매장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 자신 위안소를 자주 찾곤 했다고 고백하면서 어느날 측량작전으로 산에 올랐을때 위안부 무덤군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산속에는 봉분위에 한글로 이름이 적힌 판자쪼가리가 꽂힌 무덤이 두줄로 몇십개 늘어서 있었지요. 국경지대는 겨울이면 영하 25도까지 내려가 땅을 팔 수가 없었습니다. 관을 그대로 버려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흙을 덮고 이름패를 꽂아둔 것이지요』 『한번은 조선위안부에게 하루에 몇명이나 상대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몸이 약해 40∼45명을 받지만 건강한 사람은 60명 정도라고 말했어요』

이같은 증언을 근거로 조사단이 석문자 마을을 수소문하자 한 중국 노인이 『조선여자들의 무덤을 안다』고 나섰다. 마을에서 1㎞쯤 떨어진 산속에서 무덤은 발견되었다. 「군용지」란 돌기둥이 쓰러져 있는 곳에 약간 평탄한데가 있었다. 잡목 숲을 헤치고 들어가니 잡초에 덮인 야트막한 봉분 24개가 나타났다.

조사단은 이번 여행에서 옛 일본군 위안소건물과 자리 등 8곳을 확인했다. 그중 휘춘시내에서 찾아낸 위안소는 방이 여럿인 붉은 벽돌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이있었고 나머지는 개축됐거나 주차장 등으로 변해 있었다.

한국출신 위안부는 만나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연변 등 조선족마을에서는 만주땅에도 「조선처녀공출령」이 내려져 많은 처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갔으며,이를 피하기 위한 조혼사례가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김영희씨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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