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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홍기문 부자/이성춘 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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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홍기문 부자/이성춘 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2.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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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조선문화계의 3대 천재로 육당 최남선,춘원 이광수,벽초 홍명희를 들었다. 일부에서는 홍 대신 호암문일평(역사학자) 또는 위당 정인보(국학자)를 꼽기도 했으나 앞의 3인이 중론이었다.이들 3대 천재들이 제각기 독특한 재능을 발휘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육당은 1908년 신문관을 설립하고 잡지 「소년」을 발간,창간호에 우리나라의 첫 근대시인 「해에서 소년에게」를 쓴 것을 비롯,개화기에 출판문화사업을 벌이는 한편 사학의 대가로 활약했다. 무엇보다 그는 3·1운동때 독립선언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춘원은 한국 근대소설의 아버지. 1917년 매일신보에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한 이래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작품을 쓰고 언론계서 활약했다. 일본 유학시절 3·1운동 직전 한국 유학생들이 일으킨 2·8독립선언의 선언문을 기초한 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초기 독립신문 사장으로 항일의 필봉을 휘둘렀으나 슬그머니 귀국,일제에의 변절의 길을 걸었다.

장편역사소설 임꺽정을 써서 유명한 벽초는 정조때 세도가인 홍국영의 후손으로 그의 부친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재직중 한일합방이 되자 「국파군망 불사하위…」(나라가 깨져 임금이 없어졌는데 죽지않고 어이하리오…)란 장문의 유서를 쓰고 자결한 우국의 선비였다. 휘문고보교원과 연전 교수를 지냈고 젊었을 때는 절친한 정인보 등과 중국대륙을 유랑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1927년 창립된 민족주의자와 좌익의 집결체인 신간회의 부의장을 지냈는데 신간회란 명칭도 벽초가 지은 것.

8·15후 세 천재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일제에 협력 변절했던 육당과 춘원은 반민특위에 소환되어 곤욕을 치른 뒤 춘원의 경우 6·25때 인민군에 의해 강제 납북되어 병사했다. 벽초는 해방직후 좌익계의 문학가동맹위원장과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을 역임하다가 김일성이 남한만의 단선단정을 저지하기 위해 평양에서 소집한 소위 남북정치협상회의에 민주독립당 당수자격으로 참석했다가 그대로 잔류했다. 벽초는 초기에 김일성의 환대속에 제 1차 내각의 부수상 조국통일 민족주의 전선의장 북한 올림픽위원장을 지냈다. 북한은 벽초의 작품 「임꺽정」을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으로 평가,소설을 널리 배포하고 근년에는 영화화하기도 했는데 벽초는 68년에 사망했다.

3일 북한방송이 병사했다고 보도한 홍기문(88세)은 벽초의 장남.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8·15전후 언론계에서 일했던 홍은 부친보다 1년전인 47년에 월북해서 김일성 대학교수 민족과학자협회부 위원장 조국평화통일 위원회 상임위원 사회과학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특히 70년대 이래 북한 최고원로 역사가 및 어문학자로서 조선조실록과 팔만대장경의 번역사업을 십수년간 지휘 완료한 공로로 김일성으로부터 노력영웅칭호와 국기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필자는 지난 74년 10월 동경에서 열렸던 제61차 IPU(국제의회연맹) 총회때 북한 대표단장으로 참가한 홍기문을 잠시 취재한 바있다. 중키에 벗겨진 머리,그리고 굵은테 안경을 쓴 홍은 중후한 인품의 노신사였다.

마침 북한 대표단의 숙소가 필자가 묵고 있던 제국호텔의 바로 위층 이어서 회의 1주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호텔 로비와 엘리베이터 등에서 마주쳤다. 어느날 아침 엘리베이터 안에서 『홍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한국일보 기자입니다』고 인사한 뒤 『대학시절 벽초선생의 임꺽정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임꺽정은 남한에서 출판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들었는데…』하며 관심을 보였다. 이어 『선생님은 요즘 어떤 일을 맡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홍은 『고전국역 사업을 하고 있지요. 귀중한 자료는 남한에 더 많은데 언제 학술교류가 이뤄질지 걱정이지요』하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필자는 작년 여름 하와이대 한국연구소 주최 「미·북한학술회의」에 참석했던 석창식단장(사회과학자협회부 위원장)에게 홍의 근황을 물었다. 석 단장은 『남북한이 이념과 체제는 다르지만 홍 선생은 우리민족의 얼을 이은 마지막 국보이지요. 벌써 은퇴했는데도 학문에 대한 열정과 후배지도를 위해 가끔 노구를 이끌고 사회과학원에 나오시지요…』라고 전했다.

조선의 3대 천재의 1인 이었던 벽초와 국학의 대가였던 아들 홍기문. 그들의 공과는 두고두고 가려지겠지만 결국 홍부자는 50여년간 김일성체제를 위해 일하다가 눈을 감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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