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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현대판 노예” 불법체류 히스패닉(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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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현대판 노예” 불법체류 히스패닉(세계의 창)

입력
1992.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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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소송 계기로 본 실태/주 30불 받고 「벌집」서 중노동/평균 숙식비는 70불… 빚만 늘어일자리를 제공하겠다며 불법체류 외국인을 포도농장으로 끌어들여 노예처럼 부려온 악덕 직업알선업체의 책임자와 농장주 및 그 하수인들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어처구니 없이 싼 임금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참다못한 「노예농장」 일꾼들이 강제 국외추방의 위험을 무릅쓰고 집단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값싼 일손을 원하는 포도농장주와 손을 맞잡고 허위광고를 일간신문에 게재,날품으로 생계를 연명해가는 떠돌이 불법체류자들을 모집해온 문제의 직업중개소는 텍사스주 휴스턴에 본부를 둔 「라 피스카」.

라 피스카가 텍사스에서 발행되는 라틴계 신문에 집중적으로 때린 스페인어 광고는 이민국 직원들의 단속망을 피해다니며 입에 풀칠할 방도를 찾아야 하는 히스패닉 불법체류자들을 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당 최고 3백불까지의 임금을 받을 수 있고 숙식이 가능한데다 신청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란 플로리다주의 포도농장까지 가는데 필요한 1백50달러의 교통비에 불과하다는 것이 광고의 내용이다. 일자리 얻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판에 라 피스카가 제공한 조건은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바로 그곳에 함정이 있었다.

주로 멕시코인으로 구성된 농장일손이 플로리다주 임모카리 포도농원에 도착하자 농장감독들은 우선 이들로부터 일체의 신분증명서를 압수했다.

라벨르 농원에서 일하는 수백명의 「선배일꾼」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증명서를 압수당한 이들에게 전기시설도 없이 바퀴벌레만 새카맣게 기어다니는 「하숙방」이 배당됐다. 한방에 10여명씩 배치된 비좁고 컴컴한 하숙방은 아무런 시설도 없이 그저 감방의 통기구멍만한 창문 하나만이 빠끔하게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직 약과였다. 정말 놀랄 일은 일주일후에 벌어졌다.

뙤약볕 아래서 온종일 포도를 따며 일주일을 보낸 이들은 첫 임금을 받아들고 그만 아연실색해 버렸다. 광고에서 약속했던 3백달러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30달러가 그들의 일주일분 품삯이었다. 게다가 10인 1실로 된 하숙방 사용료가 주당 4백25달러였고 콩과 옥수수빵을 식사로 제공해준 대가로 30달러가 부과됐다. 1인당 평균 숙식비가 주당 70달러 이상인 셈이니 일꾼들은 꼼짝없이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이들은 자신이 현대판 노예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대부분 불법체류자인 탓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신분을 증명해줄만한 서류마저 빼앗긴 이들은 법적으로는 미국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살아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농원에서 일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은 히스패닉의 수는 대략 4백만명. 라 피스카는 바로 이들을 유혹해 연간 4천명정도를 노예농장에 공급해왔다.

마치 1939년 존 스타인백이 발표한 「분노의 포도」를 연상케하는 포도농원 관리자들과 라 피스카의 대표는 결국 일꾼중에 섞여있던 「미국시민」들에 의해 사직당국에 고발당했고 불법체류중인 피해자들중 26명은 국외추방의 위험을 무릅쓰고 농장과 직업소개소를 상대로 집단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기야 미국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날품팔이 불법체류자들이 국외추방을 두려워할 이유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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