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국회가 출범부터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앞으로의 전망 또한 지극히 불투명하다. 직접적인 원인은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를 둘러싼 여야간 입장차이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나 이번의 경우,야당의 대응방법에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권이 그 원인을 제공하였고 따라서 일차적인 책임도 정부· 여당에 있다.
또한 상황이 이렇게 꼬이게 된데에는 여권 지도층의 리더십의 결여와 정치가로서의 자질부족이 보다 중요한 근본원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리더십의 조건
막스 베버는 그의 유명한 「직업으로서의 정치」속에서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자질로서 ①신념 ②책임감 그리고 ③판단력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자질을 어떻게 배합하여 결합시킬 것인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신념을 중시하는 행동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행동은 상호 이율배반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신념을 지니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고려하지 않아서는 곤란하며,다른 한편 결과에 대한 책임이 두려워서 무난한 일만 하는 것도 지도자로서는 실격이다. 따라서 신념과 책임감의 양자를 잘 조화시키는 균형감각으로서의 현실적 판단력(Augenmass)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집약하면,지도자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신념과 책임감의 균형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당의 무신념과 무책임
이같은 기준에서 단체장 선거에 관한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을 살펴보건대 「신념과 책임감의 균형된 판단력」은 커녕 신념도 흔들리고 책임감도 없이 그때 그때 편의주의적으로 임의의 선택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본래 여당이 야당과 지자제법에 합의,국회통과를 본 것은 재작년(90년) 12월의 일이었다. 그때 이미 여야는 불과 만 1년후인 92년 1년 동안에 4차례나 선거를 치른다는 엄청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때의 정부·여당의 결정을 선의로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될 것이다. 곧 6·29선언에서 약속한 민주화의 추진이라는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선거로 인해 발생할 결과로서의 경제에의 악영향에 대해서는 이를 「민주화(신념)를 위한 비용(책임)」으로 각오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각오마저 없었다면 당시의 결정은 야당의 주장과 여론에 밀려 무신념의 타협을 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지자제 실시 합의에 따른 경제적 비용에 대한 책임윤리가 전혀 결여되어 있었다고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노태우대통령은 금년 1월의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단체장 선거실시를 95년으로 미루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다. 이유는 역시 경제안정을 위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노 대통령의 일방적 결정을 「신념」과 「책임감」과의 관계에서 해석하면 아래와 같은 설명이 될 것이다. 곧 잦은 선거로 인해 발생할 경제적 문제에 대한 「책임감」때문에 민주화 추진이라는 종래의 「신념」을 부분적으로 후퇴시킨다는 것이다.
불과 1년 사이에 대통령의 「신념」이 경제적 비용을 각오한 「민주화추진」에서 민주화의 지연을 비용으로 각오한 「경제안정」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것이 진짜 「신념목표」이고 어느 것이 감내하여야 할 「비용」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정부·여당은 단체장선거 연기에 관해,이는 뒤늦게 나마 경제에 대한 책임윤리를 인식하여 민주화 추진이라는 신념을 부분적으로 조정하여 양자간의 균형을 취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같은 주장에도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경제안정에 대한 책임윤리를 인정해 준다하더라도 정부는 단체장선거를 연기함으로써 발생할 또 다른 책임,곧 정부 스스로가 법을 위반하게 된다는 점에 관해서는 전혀 책임윤리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보아 정부·여당은 이번 정책결정에 있어 목표에 대한 신념이 오락가락한 데다가 책임윤리 마저 단세포적이었거나 아예 결여되어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리더십의 조건을 어느 하나 갖추지 못한 결정이었으니 정치의 위기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야당도 균형감각을
야당이 정부·여당의 일방적·불법적 단체장선거연기를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투쟁방법에 관하여든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곧 민주화의 추진이라는 신념의 관철을 위한 투쟁의 국회를 공전시켜 국정전반엔 관한 의무를 방치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또한 단세포적 과잉신념이 빚은 책임윤리의 결핍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야당에도 「신념과 책임의 균형감각」이 요구되며 균형의 내용은 민주화와 경제안정이 조화된 것이어야 하고,그 구체적 방안은 국회의 운영이 정상화된 가운데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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