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내치연장”등 차이 뚜렷/“모든 나라와 관계”… 「방소」가 일례/김영삼/“민주화가 기본”… 폭넓은 친교 강점/김대중/경제실리 우선… 민간교류 중요시/정주영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세계속에서 분단국인 이 나라를 떠맡겠다고 나선 후보들의 대외관은 어느분야 못지않게 중요하다. 후보들은 정치와 경제에서 일가를 이룬 여세를 바탕으로 해 대외문제에 접근하면서 자기목소리를 내려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정세라는 사안 자체가 미묘하고 유동적이어서 이들의 대외관계 얘기가 변화무쌍한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김대중 민자당대표의 외교철학은 다원주의적 접근방식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국가형태를 갖추고 있는 지구촌의 모든 나라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김 대표 외교관의 기조이다. 그러면서 민족자존의 자주적 이념을 기존의 외교노선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각오를 동시에 새기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 대표의 이같은 「외교원론」은 그가 사회주의국가 등 미수교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능동적으로 대처해온 사례들을 살펴보면 설명이 쉬워진다.
지난 89년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 대표는 국내 정치지도자로서는 최초로 소련을 방문,프리마코프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만나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구조의 정착을 위한 이해당사국간의 관계정상화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는 결국 이듬해 고르바초프 당시 서기장과의 역사적 만남을 성사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또한 후일 한소수교의 발판을 구축한 외교적 이벤트로 평가될 수 있다는게 김 대표 측근들의 주장이다.
이에앞서 김 대표는 88·89년 두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일본 사회당의 대한관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계기를 부여했으며 이를통해 우리가 사회주의국가와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려는 외교정책의 단서를 잡게했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사회주의국가와의 수교교섭은 공식외교 채널을 통해서는 진척이 느렸기 때문에 김 대표의 발빠른 행보는 그 견인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는게 측근들의 설명이기도 하다.
이같은 「김영삼외교」의 접근방식은 물론 정치인으로서의 행보였지만 국익을 최우선으로 해야하는 외교문제만큼은 초당적 초정파적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평소지론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 대표는 이와함께 대미,대일 등 기존우방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새로운 태평양시대의 동반자적 연대를 무엇보다 중시하고 있다고 측근들은 설명하고 있다.
『새 친구를 얻기위해 옛친구를 버리는 우를 범할순 없다』는게 김 대표의 일관된 생각이란 것이다. 또한 김 대표의 외교적 교분은 매우 광범위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미국의 경우 야당지도자 시절에는 주로 민주당 의원들과 교분을 쌓아왔으나 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공화당 인사들과도 교류의 폭을 넓혀왔고 일본의 경우도 자민당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등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과 두루두루 관계를 맺고있는 유일한 국내 정치지도자라고 측근들은 보고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만난직후 『한반도에 전쟁위협은 사라졌다』고 말했다가 성급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외교교섭의 전문가가 아닌 「정치인 김영삼」의 입을 통해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고 측근들은 주장한다.<정진석기자>정진석기자>
○…김대중 민주당대표의 외교관은 그의 민주화의 논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외교는 내치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민주화가 달성되어야 국가가 대외관계에 있어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북방정책이나 통일문제에 대한 접근도 이같은 착점에 근거하고 있다. 민주화가 되어 사회가 탄력이 붙을 때 통일문제에서의 우위선점이 가능하고 북방문제에 있어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기조에다가 최근들어 국제정세의 변화를 감안해 실리적 측면이 가미되기도 한다. 이와함께 김 대표는 과거 군사대국들이 행한 비도덕적 대약소국정책의 폐해를 스스로 경험했기 때문에 『약소국을 지원하고 더불어 사는 도덕적 선진국가』의 이상을 강조한다.
김 대표는 외교분야에서도 기민하게 대응해왔다고 측근들은 보고있다. 그는 최근 외신기자회견을 통해 장기적인 미군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종래의 점진적 철수주장과 확연히 구별되는 이같은 발언은 최근 가시화한 일보의 군사대국화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라고 측근들은 설명한다.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상대국에 대한 김 대표의 태도와 이들의 김 대표에 대한 입장이 상당부분 탄력적으로 수정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상흔이 일제식민지 통치라는 역사적 반일정서와 겹친 그로서는 역대 독재정권과 유착현상을 보인 일본이 자민당 정권에 호감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일본 또한 김 대표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로 꼽고있다.
그러나 현실적 이유에서 그는 일본과의 관계회복을 서두르고 있다. 그는 『이제 73년 사건은 모두 매듭된 문제』라고 선언하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일본 정계의 부담감을 거의 씻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
미국에 대한 그의 애증도 거의 희석된 것으로 보인다. 역대 미국 공화당정권의 우리나라 독재정권 지원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던 그는 80년 5월의 사형언도 당시 공화·민주당을 망라한 미국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구명운동 당시 적극적 참여자였던 도널드 그레그 현 주한 미 대사와 아직도 특별한 친교를 나누고 있다.
김 대표는 스스로가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일것』이라고 자신하듯이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것과 함께 세계의 정객들과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측근들의 평가이다. 독일의 폰 바이체커 대통령,빌리 브란트 전 총리,겐셔 전 외무부장관,미국의 에드워드 케네디,루가 상원의원 등 세계 곳곳의 거물정치인들과 친교를 맺고있다.<황영식기자>황영식기자>
○…정주영 국민당대표의 외교관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실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자신 기업인으로서 해외의 대규모 공사수주나 기술협력 등을 계기로 외국과 관계를 맺어온 경험이 많은데다 최근의 국제역학 관계가 정치·군사보다는 경제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또 정부간의 교류 못지않게 민간차원의 외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미수교국이나 그다지 가깝지 않은 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민간경제 외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고있다.
정 대표는 이와함께 개인이나 기업간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항상 「신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 대표는 미국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있다. 그동안 기업을 경영해오면서 기술협력 등 경제파트너를 주로 미국에서 찾았고 현대의 수출시장 또한 미국이 주요대상이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향후 대미관계에 대해 『최우방국으로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면서 『다만 서로 대등한 입장에 서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상호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밝힌다.
정 대표의 미국관은 최근 토론회 등에서 밝힌 그의 안보문제에 대한 시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 대표는 「시사저널」토론회에서 『북한이 남침하지 못하는 것은 주한미군 때문』이라며 『미군이 철수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이같은 대미관을 반영하듯 정 대표는 미국에 적잖은 지인을 갖고있다. 지난 84년에는 레이건대통령과 단독대좌를 하기도 했으며 재계는 물론,키신저 브레진스키 와인버거 슐레진저 등 정·관계 고위인사들과도 가까운 사이라고 측근들은 설명한다.
정 대표는 미국과의 관계에 비해 일본과는 그리 가까운 편이 아니다. 일본과도 기술협력 등을 위해 접근시도를 했으나 일본측의 폐쇄적 태도로 가까워질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한다. 정 대표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오늘날 일본의 부가 이루어진 것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많은 사람을 학살해서 경제력의 기초를 닦았기 때문』이라며 『일본이 평화라는 이념아래 해외 파병조치를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그 부의 반을 갈라서 동남아국가들에 배상하고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대일관의 일단을 표현했었다.
정 대표는 자신이 북방외교에 나름대로 일조를 했다고 믿고있다. 89년 1월 당시 소련을 처음 방문하고 90년 6월 고르바초프를 만났던 정 대표는 시베리아 개발 등 이 지역의 잠재력에 아직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다만 정 대표는 정부가 구 소련에 30억달러의 경협을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소련의 정세를 잘못 판단한 것』이라며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국민당측은 정 대표만큼 외국과의 협상경험이 많은 정치인은 드물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동시장에 진출하면서 유럽국가들의 외교적 방해에 맞서 현지 왕족이나 정부 고위인사들과 담판짓던 일들을 사례로 제시한다.<정광철기자>정광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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