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아낙네로 참모로 내조/식사대접·선거운동등 그림자 역할/김영삼/조언자·동지관계… 연설문도 챙겨/김대중/전통적 여인… 「병상서 마음의 성원」/정주영여야 3당의 대선후보들이 길고긴 인생역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과정을 맡할떼 부인들의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
남편과 영욕을 함께 나누며 동고동락해온 이들은 때로 남편보다 더한 「투사」였으며 떼로 이심전심의 「측근참모」역을 맡아왔다. 자신들의 퍼스트레이디 꿈에 생각이 미칠 겨를없이 뒷전에서 묵묵히 남편의 치다꺼리를 맡아온 이들의 어제 오늘을 살펴본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의 부인 손명순여사(64)는 지난 40여년간 김 대표와 온갖 영욕을 함께했지만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내조자로 정평이 나 있다.
손 여사는 3당 합당이전 김 대표의 30년 야당시절 모진 풍상을 겪었고 지난 4대 총선부터 줄곧 유세장을 따라다니며 김 대표를 도와 어느덧 선거에 관한한 「전문가」가 됐지만 『나는 남편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자신의 「그림자 역할」만을 강조한다.
지난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 대표 유세장에서 청중속에 섞여있던 자신을 TV카메라가 클로스업 시키자 들고있던 깃발로 얼굴을 가리던 장면은 이러한 내조자세와 관련해 종종 언급되는 대목이다.
손 여사는 지난달 당내 후보경선때도 김 대표의 개인연설회장에 빠짐없이 참석,선거운동에 일조했다.
손 여사는 당시 잇단 대중연설에 따른 김 대표의 목관리를 위해 매일 아침 식초에 탄 생계란 노른자를 준비하고 차안에 소금물을 항시 비치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손 여사는 상도동 자택을 찾아오는 숱한 내방객들에게 손수 식사를 대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평소 김 대표의 식성에 따른 잡곡밥과 야채국을 주요 메뉴로 내놓는데 특히 쇠뻐국물에 햇배추로 끓인 배추국은 상도동의 별미로 소문이 나있다.
이미 김 대표의 야당시절 야당가에서는 정치 지망생들의 경우 배추국을 얼마나 먹었느냐에 따라 정치입문 성패가 좌우된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로 손 여사의 「식사대접 내조」는 긴 내력을 갖고 있다.
이와함께 손 여사는 해마다 명절때가 되면 가까운 의원 부인들과 함께 상도동 일대의 양로원·고아원·영아원 등을 방문,신앙인(충현교회 권사)으로서의 「의무」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손 여사는 김 대표의 정치역정에서 가장 괴로웠던 시기는 지난 83년 김 대표의 단식투쟁때였다고 한다.
김 대표의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 정지처분(79년) 가택연금(80년) 등 정치적 역경도 물론 힘겨웠지만 김 대표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서 느끼는 절망감에 비힐바가 아니었다는 것.
이때 손 여사는 김 대표의 단식중단을 위해 자신도 이틀간 단식을 했으나 『내가 쓰러지면 누가 남편을 돌보나』하는 생각에서 그만두었다는 것.
손 여사는 만약 이번 대선을 통해 퍼스트레이디가 된다면 지금처럼 조용히 김 대표를 뒷바라지하되 여건이 허락할 경우 교사들의 지위향상과 기혼연성들을 위한 탁아소·후생시설 증설을 지원해 보겠다는 「소박한」 계획을 품고 있다.<유성식기자>유성식기자>
○…김대중 민주당 대표와 부인 이희호여사(70)와의 사이는 부부라기 보다는 「이념적 동반자」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김 대표에게 있어 이 여사는 내조를 하는 부인이상의 존재이다. 충실한 조언자이자 동지이고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의 동교동 자택에는 문패가 2개 걸려있다. 이 여사의 이름이 적힌 돌로된 문패가 똑같은 형태로 된 김 대표의 문패 옆에 나란히 걸려있다.
김 대표의 일거수 일투족에 스며들어 있는 이 여사의 체취와 입김을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김 대표 자신은 이를 남녀평등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진정한 이유는 그런 차원만이 아닌 것 같다. 김 대표가 이 여사에게 보내는 사랑과 존경의 마음은 그가 사형선고를 받고 옥중에서 보낸 서신들에 잘 나타나 있다.
김 대표는 봉함엽서 1장에 2백자 원고지 1백여장 분량의 깨알같은 글씨로 쓴 옥중서신에서 항상 시작을 『한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썼다. 이에대해 이 여사는 『당신의 생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고 화답하곤 했다.
김 대표는 그 세대의 정치인중에서 비교적 빨리 여권신장 문제에 눈을 떴고 지금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 여사의 영향이 크다는 지적이다.
두사람은 62년 5월 결혼했다. 김 대표가 3년전 첫 부인과 사별하고 홍일,홍업 두아들과 살고 있을때였다. 그러나 두사람의 첫 만남은 11년전인 6·25전쟁때의 피란지인 부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여사는 이화여전을 거쳐 서울사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여자 청년단 외교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면우회」란 모임의 회원이었다.
이 여사는 「면우회」에 신규 회원으로 들어온 젊은 사업가 김 대표를 첫 대면했다.
그뒤 이 여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램버드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스카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다가 두사람은 61년 정일형·이태영박사 부부때문에 다시 만났고 이들의 권유로 재혼했다.
만약 이 여사가 정치인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갔더라면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을 것이라는 평가에 인색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김 대표에 대한 이 여사의 내조는 식사준비와 옷고르기에서부터 시작해 정치현장을 대힌 찾을 정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이 여사는 13·14대 총선때 김 대표 못지않게 선거현장을 누볐다. 그리고 김 대표의 연설원고 작성에서부터 현장 모니터까지 구석구석을 챙긴다. 지난 87년 대선때는 김 대표의 연설을 차속에 앉아 메모하는 이 여사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이병규기자>이병규기자>
○…정주영 국민당 대표의 부인 변중석여사(71)는 정 대표의 정계진출이후 한번도 대중앞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다. 현재 풍납동 중앙병원에 장기입원중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16일,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바로 다음날 정 대표는 선영에 이어 중앙병원을 찾았다.
평소 1주일에 3∼4차례씩 부인을 문명하지만 이날은 특별히 감회를 느끼는 것 같았다는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정 대표는 종종 사석에서 『내가 돈을 많이 번 것은 집사람 덕분』이라며 부인을 칭찬하곤 한다. 자신이 사업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동안 부인이 불평없이 집안을 잘 꾸려준 덕분에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정 대표는 주변인사들은 변 여사를 전통적인 한국여인이라고 평가한다. 아들 정몽준의원은 『우리 어머니는 내조라는 말을 모르실 것』이라는 얘기로 변 여사의 심성을 표헌하기도 한다. 그만큼 평범한 「아낙네」의 삶을 살아왔고 그 생활자체가 내조가 됐다는 얘기이다.
정 대표는 55년전 서울에서 쌀가게로 기반을 잡은뒤 6세 연하의 변여사와 결혼했다. 당시 정 대표 나이는 22세. 신부는 고향마을 아산리에 사는 면장의 맏딸 이었다.
변 여사가 남편을 따라 단칸 셋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할즈음 그의 친정집은 모두 청진으로 이사했고 이후 한번도 친정식구들을 만나지 못했다.
변 여사는 대한민국 최고부자의 부인답지 않게 소탈하고 부지런하다는게 주변의 한결같은 평가이다. 집안에서는 늘 헐렁한 통바지와 스웨터 차림으로 지내며 입원 전에는 부엌일과 집안 가꾸기를 도맡아 했다는 것. 매일 새벽 아들들과 함께하는 아침식사를 직접 차리고 정 대표가 좋아하는 순두부를 집에서 만들곤 했다. 낮에 손님이 찾아왔다가는 통바지 차림의 변 여사에게 『사모님은 어디에 계시냐』고 묻기도 했다는 것이다.
변 여사는 음식을 남에게 베푸는데 있어서는 「손이 크다」는 소리를 듣는다.
음식대접하기를 좋아하는 변여사가 6·25 당시 남편의 사업손님과 일꾼들에게 밥상을 차려주느라 집한채 값에 가가운 외상을 졌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변 여사는 현대가 계동사옥으로 이사가기 직전까지 구내 식당에서 주방일을 도왔다.
또 얼마전까지는 메주를 쑤어 친지들과 비서실 직원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정 대표는 요즘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우리 아내』라고 말한다. 실제 젊은 시절 상당한 미인이기도 했던 부인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이렇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퇴행성 관절염(신경통)으로 2년 가까이 입원중인 부인에게 정 대표는 『병도 없는 사람이 왜 자꾸 병있는 척 하느냐』고 「면박」을 주어가며 나름대로 「병상의 내조」를 받고 있는 셈이다.<조광철기자>조광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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