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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원론/조영환 미 애리조나주립대 교수(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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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원론/조영환 미 애리조나주립대 교수(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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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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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한국전쟁 42주년을 맞는다. 북한의 남침배경과 중국군의 참전동기 등 한국전쟁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은 그동안 끊임없이 전개돼왔다.그러나 42년이 흐른 지금도 명쾌하게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 남아있다.

우선 남침 결정과정에 관한 대목이다.

북한 김일성은 48년을 전후로 남침준비에 박차를 가해왔다. 이 무렵 모택동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본토를 거의 장악하고,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군사적 비개입 원칙을 천명했으며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하는 등 김일성에게 고무적인 현상이 잇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 소련 국방부 전사실장을 역임하고 현재 옐친 러시아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있는 볼코고노프 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의 스탈린 면담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의심많은 스탈린이 김일성과의 비밀회담을 기록에 남기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공식문서에 남아있는 것은 49년 3월5일에 이뤄진 김­스탈린 회동과 두차례의 암호전문 정도이다.

김일성은 스탈린과의 면담에서 양국간 군사·경제기술 교류에 관해 집중 논의하면서 남한의 적화통일문제를 거론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가능성을 우려,김의 계획을 무모한 모험이라며 달갑지 않게 여겼다.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한다해도 50일은 걸릴 것이라며 거듭 적화통일의 성공 가능성을 역설하자 스탈린은 그때서야 미국이 개입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않는 속전속결 방안을 군사고문단과 협의하도록 지시했다.

스탈린의 남침지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소련의 고로도코프 군사연구원의 증언.

그는 지난해 여름 스탈린과 김일성이 전쟁직전(2월23일) 밤늦께까지 남침여부를 둘러싸고 언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스탈린이 조기 개전의 압력을 넣자 김일성이 준비부족을 이유로 반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중국의 지원을 받지 않는 단독전쟁을 주장한 스탈린에 대한 김일성의 반발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스탈린의 남침사주 가능성은 소련과 중국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양국은 동맹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갈등을 노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49년 12월부터 50년 2월까지 진행된 조약체결 과정에서 모택동은 만주에 대한 스탈린의 요구를 일축하고 오히려 여순,대연항을 포함한 이 지역 기득권 포기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중국은 3억달러에 이르는 소련의 원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등 스탈린을 격분시켰다.

더욱이 중국은 45년 6월부터 49년 3월까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비밀접촉을 시도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있던 스탈린은 모택동이 「티토」화 할 것을 우려,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아래 둘 수밖에 없다는 전략적 계산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소련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적극 후원하게 됐고 그 결과 바실리예프 중장 등 소 군사고문단과 북한 군지휘관들간의 합작품인 「선제타격작전계획」이 탄생했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 군수뇌부간의 관계를 감안할때 김일성은 남침사실을 중국에 사전 통보할 것으로 보인다.

모택동은 당시 스탈린 못지않게 한국전쟁에 관해 회의적이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국은 대만해방작전을 무기한 연기할 수밖에 없고 미국의 경제원조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중국군에 배속돼있는 조선인부대 파견요청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중국이 참전여부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힌 후였다.

주은래는 그해 10월 유엔군이 중국의 경고를 무시한채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고 맥아더가 만주 공격의지를 천명하자 모스크바로 날아가 중국의 참전을 소련측과 논의했다.

소련 지도부는 이때까지도 중국군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고수했고 중국 수뇌부내에는 찬반이 엇갈렸다.

중국 수뇌부가 대립했던 증거는 당시 모스크바에 가있던 주에게 보낸 통지문이 「불개입」,「개입」으로 혼선을 빚은데서 나타난다.

모택동은 고심끝에 참전결정을 내렸고 이를 스탈린에게 통보했다. 이에 소련은 3개 사단의 군사물자만 보급하고 병력을 일체 파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번복,항공군단까지 파견키로 결정했다.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 양국으로부터 병력지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한 순간이었다.

김일성은 이처럼 중국과 소련의 대립양상을 교묘히 이용해 한국전쟁에 깊숙이 끌어들이는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물론 소련측으로서도 김일성의 도발이 중국견제라는 포석을 깔고 있었던 만큼 한국전쟁이후 중국과 미국의 대립을 이용한 세계전략적 차원의 이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전 참전으로 그때까지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권아래에 있던 북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된다. 중·소 분쟁의 시발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을 남침 준비과정에서부터 끌어들여 총공세로 부산까지 전격적으로 점령했더라면 미국이 개입을 단념하고 우리의 운명도 뒤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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