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에 도청 회오리/“다국적 기업등 운영실태 체크”/야당 “권력남용 행위” 강공세/“맥스웰 자금유용도 알고 있었다”/전 공무원 폭로… 기업선 “국익차원”【런던=원인성특파원】 영국의 정보기관이 자국 기업 및 다국적 기업들을 상대로 도청을 해왔으며 지난해 의문사한 언론재벌 맥스웰의 자금유용에 관해 지난 89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전직 정보기관 종사자의 증언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보도해 정부를 난처한 입장에 몰아넣었다. 정부내의 비밀 정보분석기관인 합동정보위원회에서 1년여간 근무했던 로빈 로빈슨은 보도가 나간뒤 BBC 등 다른 언론기관에도 이같은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로빈슨은 합동정보위에 근무하던 지난 89년 로버트 맥스웰이 이스라엘과 지중해상의 요트로부터 본사와 교신하는 내용이 도청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으며 이같은 정보는 영국 중앙은행과 총리실,주요 부처 등에 보고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합동정보위가 방위산업체인 롤스 로이스와 무역업체 론로·GEC·미국의 제너럴 모터스 등 대기업들의 전화·팩스·텔렉스 교신 등을 도청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85년부터 공무원생활을 시작한 로빈슨은 88년 합동정보위에 배치돼 1년여간 근무해왔는데 퀘이커교도인 그는 신앙적 양심상 이같은 일을 계속할 수 없다며 89년 말 사표를 제출했다. 사직 당시 그는 언론에 합동정보위가 권력을 남용해 불필요한 영역에서까지 정보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이같은 논란이 제기되자 정부는 즉각 반박에 나섰다. 고위 정부관리는 이 보도에 대해 국가안보를 이유로 답변을 거부했으나 로빈슨이 합동정보위에 재직한 기간이 극히 짧을 뿐 아니라 중요한 정보를 직접 취급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존 메이저 총리는 16일의 의회답변에서 당시 총리실이나 주요 부처에서 맥스웰의 행각에 대해 정보보고를 받은 기록이 없다며 이같은 주장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하지만 언론은 합동정보위가 맥스웰의 불법적인 사업활동을 탐지하고 이를 영국 은행이나 총리실 등에 보고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맥스웰과 다른 주요 기업의 교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관계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1만여명의 직원을 두고 최첨단 정보수집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미국의 국가안보회의(NSC) 등 주요 우방의 정보기관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갖고 있는 합동정보위는 영국내는 물론 전세계의 전화교신 및 팩스 텔렉스 등을 모두 도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도했다.
따라서 과거에는 소련 및 동구를 대상으로 중점적으로 도청활동을 벌였으나 냉전이 종식된 후에는 군수산업 등 주요기업의 활동을 감시해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했다.
국가정보기관이 민간기업의 활동을 상대로 정보수집을 해왔다는 사실은 정부권력의 악용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야당인 노동당은 정보기관이 민간기업의 활동을 도청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정부의 답변을 요구하는 등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대부분 언론과 도청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된 해당 기업들의 반응은 예상밖이다. 이들은 진상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공식 논평을 회피,정부와의 마찰을 피했다. 오히려 비공식적으로는 정부가 방위산업 등 전략적으로 민감한 기업의 활동을 체크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이다.
언론도 현재 정보수집 기술상 모든 통신행위가 정보기관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현실로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때문에 불필요한 개인생활의 침해 등 국가정보기관의 권력남용이 없도록 엄격한 통제를 해야 한다고 지적할 뿐 이를 심각한 정치문제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 이같은 언론이나 기업의 반응은 영국의 정보기관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활동할 뿐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권한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국민적 신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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