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웅. 아마도 우리 현대사에서 이 사람처럼 수수께끼의,정체불명의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이승만정권 출범전후부터 몰락때까지 국내에서 일어난 암살·모략 등 수많은 정치적 사건에 으레 숨은 주역의 하나였다. ◆김이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저지른 범죄적 사건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김성주 살해사건,신익희조소앙 뉴델리 밀회설 사건에도 관여하는 등 반이 정권세력의 타도와 교란에 모사로 활약했던 그의 범법행위중 최대 「역작」은 두말할 것 없이 백범 암살사건이다. 그는 나중 자신이 친일파였기 때문에 『백범이 생전에 만나주지도 않았다』면서 암살에 무관하다고 극구 변명했었다. 그러나 1974년 5월 홍종만씨(당시 55세)가 『나는 서북청년회를 거쳐 송두희와 함께 한독당에 입당,김으로부터 자금과 권총을 지급받았던 10여명의 행동대원중의 일원이었다』고 25년만에 털어놓음으로써 그의 「관련」은 명백해졌다. ◆김이 스스로 밝힌 경력은 이렇다. 1912년 평북 의주에서 출생후 만주 안동현립중학교에 이어 하북성의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한뒤 한때 안석원장군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대위로 제대했다. 이어 왕정위가 남경에 세운 친일정권 군부대의 여단장을 지냈고 8·15 종전후에는 국부군에 들어가 중공군과 싸우다 48년 귀국,원용덕의 헌병사령부에서 촉택으로 지냈다. ◆그는 4·19후 백범 암살진상 규명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에 밀항,1년3개월간 복역하다가 전 중국 파견군 사령관을 지낸 오카무라(강촌) 대장의 보증으로 출옥한뒤 미즈하라(수원청정)로 이름을 바꾸고 군마현과 오키나와에 농장을 가꾸며 유족하게 지냈다. 김은 『내가 백범암살을 지휘했다』며 망명을 요청,일본경찰이 한국에 조회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후 일본에서 거처를 숨기며 살았던 김이 88년에 78세로 사망,유해가 몰래 본국에 돌아와 묻혔다고 보도되고 있다. 그와 같은 죄인도 죽어서는 고토에 묻히기를 원했던가. 그가 생전에 관여했던 사건들의 전모를 미리 밝히도록 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