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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세 후보」 위기관리능력(대권가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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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세 후보」 위기관리능력(대권가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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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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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발… 의지… 돌파력 “일가견”/고비·위기타개 남다른 감각 정평/김영삼/세심·치밀 장고형… 어려울 때 “진가”/김대중/투지·뚝심갖고 특유 「밀어붙이기」/정주영여야 3당의 대선후보들은 이순의 나이테를 쌓아오는 오랜 인생역정에서 숱한 시련에 부닥치고 이를 극복하며 나름대로 독특한 위기관리능력을 키워왔다. 우리의 정치경제사가 파란과 곡절로 점철됐던 만큼 자신들이 속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온 이들은 순간순간 남다른 형세판단과 국면타개의 비법을 체득했다고 할 수 있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듯 끝없이 도전적 삶을 살아온 이들을 지탱시켜온 잠재력을 살펴본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정치상황의 고비와 위기를 감지하고 이를 신속히 타개해나가는데 남다른 후각을 갖고 있음은 정평이 나 있다. 김 대표에게 붙어 다니는 「감각정치」란 대명사는 이같은 스타일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69년 40대 기수론의 제창에서부터 79년 의원직 제명,80년대 단식,신민당 창당,직선제 투쟁을 거쳐 90년 3당 합당에 이르는 그의 정치이력은 위기에 맞선 곡예비행의 궤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방식은 70년대 당내 소수파로서 당권을 잡고 반유신투쟁을 이끄는 과정을 통해 여론과 명분을 우선적 가치로 앞세워야 했던 현실에서 얻어진 것이기도 하다. 바꿔말해 김 대표가 여론과 명분을 양대축으로 삼아왔기에 어떤 긴급한 상황이 전개될 경우 좌고우면하기보다 속도전을 펼치며 문제를 정면 돌파하는 체질을 내재하게 됐다는 것이다.

「필사칙생」을 자주 입에 올리는 김 대표의 국면 타개방식은 때로 위험스럽고 때로 무모하게까지 비치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승부수는 「해피엔딩」의 결과를 얻어냈다. 의원직 제명을 감수하며 반유신열기에 기름을 부은 것,23일간의 단식을 통해 민주세력의 결집계기를 마련한 것,정치일번지 종로에 이민우씨를 전격 공천해 신당 돌풍을 이끌어낸 것,민한당의 공중분해를 통한 야당의 정통성확립,이민우씨와의 결별,내각제 파동 등등- 정치상황의 고비 때마다 그가 보여준 순발력,정면돌파 등에 얽힌 일화는 무수하다.

이 모두가 형세와 여론을 순간적으로 읽고 즉각 행동으로 옮기는 「판단­결단­돌파」의 3박자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하지만 여론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낙관하는 패턴과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스타일은 작게는 71년 후보지명전 패배에서부터 크게는 80년 서울의 봄과 87년 대선공간에서 야당의 분열로 민주화 및 정권교체 꿈의 좌절을 맛보게 한 것도 사실이다.

김 대표는 리더십문제가 언급될 때마다 『경험이 최고의 지식』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특정분야의 전문지식보다 사회갈등을 조정 통합하고 정확한 판단과 결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수없는 역경의 터널을 헤쳐나온 자신이야말로 국가를 관리하고 위기를 타개해나가는 능력과 의지면에서 앞선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껏 김 대표의 위기관리능력은 영욕의 반전속에 정치분야에서만 시험받은 것이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군사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 사회 각분야의 갈등과 이해가 상충되는 현실에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지가 관심이다.

금명 보좌진구성을 매듭,「과거의 투사적 이미지를 뒤로하고 합리화 과학을 증시하는」 체질로의 대권수업을 본격화하게 될 김 대표의 국정관리능력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행보에 달려 있다.<이유식기자>

○…김대중 민주당 대표는 위기에 강한 정치인이라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이 경우 위기에 강하다는 얘기는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나다기 보다는 위기에 닥쳐서도 헤쳐나오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이는 김 대표가 정치생활의 주요 고비를 권력의 모진 탄압과 박해가 주는 위기상황속에서 영위해 왔다는 사실과 깊은 상관 관계에 있는 대목이다. 김 대표는 평생에 다섯차례나 생사를 고비를 넘겼고 16년간의 정치규제 때에는 일거수 일투족이 유리알처럼 외부에 투영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의 위기 극복능력은 체득적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는 주위의 설명이다.

김 대표의 한 오랜 측근은 『김 대표는 위기가 닥치면 동물적 육감이 발동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김 대표 본인은 『항상 바른쪽에 서고,국민과 역사의 편에 서면 큰 실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 대표의 위기관리능력은 세심하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빈틈없는 성격과 그에 가해진 온갖 풍상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설정된 척박한 주변상황은 때로 김 대표에게 지나친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불필요한 대목이 되기도 한다.

김 대표는 6년에 걸친 감옥생활을 한데다 고립무원의 경지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드문 체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김 대표는 어지간한 상황변화가 주어져도 이에 대한 반응을 좀체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심사숙고끝에 내린 결정은 그 기본줄기를 특별한 일이 없는한 잘 바꾸지 않는다.

원칙에 충실한게 바로 위기관리의 첩경이라는게 김 대표 주변의 설명이다.

김 대표는 정치생활중에 주요결단을 여러번 내렸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그를 있게한 71년의 신민당 전당대회. 당시 모든 관측통은 김영삼씨의 승리를 점쳤지만 그는 끝까지 당지도부의 후보사전조정에 정면대응,대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해냈다. 79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씨를 밀어 10·26까지 이어지는 정국 격동의 토대를 마련한 점,86년의 개헌정국에서 대통령직선제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신민당을 분당시켜 가며까지 강력한 투쟁을 했던 점,90년 가을 단식으로 지자제를 관철시키기고 91년 가을에는 허를 찌르듯 야권통합을 이뤄낸 점 등이 대표적인 정치적 결단으로 꼽힌다.

그러나 86년 가을 건대사건이나자 조건부 대통령 불출마를 선언했다가 이듬해 이를 번복한 일,87년 대선정국에서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해 야권을 분열시킨 점 등은 두고두고 잘못된 결단의 대표적인 예로 지적된다.

김 대표 자신도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부분이 바로 87년의 후보단일화 실패라고 말하고 있다.<이병규기자>

○…정주영 국민당 대표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자서전 제목이 말해주듯 기업경영을 해오면서 숱한 위기와 결단의 순간을 맞았다.

정 대표는 기업가로서 겪었던 최초의 시련인 고령교 공사때의 심정을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이것은 시련이지 실패가 아니다. 생명이 있는한 실패는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극복하고 넘어가 한 과정의 시련으로 만들어야지 손들고 주저앉아 영원한 실패로 기록되게 할 수는 없다」

정 대표는 정치참여를 선언한지 3개월,국민당 창당후 40여일만에 총선을 치르면서 줄곧 이같은 「시련의 철학」으로 무장한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실제 그는 총선승리에 대한 자기 확신 때문이었는지 「이변」으로 표현된 국민당 의석확보에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정 대표는 6·25 와중인 53년 4월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 복구공사를 수주하면서 첫 시련에 부딪친다. 장비부족과 인플레로 엄청난 적자를 본 정 대표는 가족들의 집까지 팔았으나 오랜기간 빚에 시달려야 했다. 정 대표는 자서전에서 「신용」을 얻기 위해 적자를 감수하면서 기를 쓰고 공사를 마쳤다고 회고했다.

이후 한강인도교 등 큼직한 정부공사들을 따냈던 정 대표는 4·19후 「정경유착」시비로 또 한차례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 때부터 해외로 눈을 돌린 정 대표는 태국 월남 등지에서 훗날 중동진출의 기틀을 닦았다.

현대출신 인사들은 정 대표의 두번째 큰 시련을 80년 산업통폐합때로 기억한다. 국보위에 의해 자동차산업과 발전상업중 택일을 강요받은 정 대표는 자동차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중공업의 전신인 창원중공업을 내놓고도 자동차공장을 인수받지 못했던 정 대표는 지금도 당시 상황에 대해 분개를 감추지 못한다.

어쨌든 정 대표는 이 당시 주위 참모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앞으로 수조원시장이 될 것』이라며 자동차부문을 택했다고 현대출신 인사들은 소개한다. 결정적인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서 정 대표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고 그것은 절묘하게 적중해 왔다는게 측근들의 주장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울산조선소 건설,사우디 주베일항공사 수주 등이 대표적 사례라는 것이다.

정 대표 측근들은 세번째이자 가장 큰 정 대표의 시련은 이번 정치참여라고 말한다. 정 대표가 밝혔듯 「기업가로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치른 홍역」을 이번에는 스스로 정치인이 되어 겪는 셈이다. 정 대표 특유의 투지와 직관력이 정치판에서도 적용될 것인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정광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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