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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술문화와 협약정치/한상진칼럼(밖에서 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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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술문화와 협약정치/한상진칼럼(밖에서 본 한국)

입력
1992.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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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오늘날 동아시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동아시아는 유교문화권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한국인은 특이하게도 개방적이고 도전적이다. 위계질서의 속박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있다. 그만큼 서구화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인에 비해 의사표현이 자유롭고 욕구 분출이 왕성하다. 복종보다는 참여를 원하며 놀랄만큼 경쟁적이다. 정보의 순화도 빠르다. 집단에 순응하기 보다 도발적이고 표출성이 강하다. 지가 이해에 악착스럽고 적극적이다. 한마디로 엄청난 에너지가 사회의 혈관을 흐르고 있다.부작용도 크다. 도덕성의 붕괴,공동체의 해체가 단적인 보기이다. 나만을 생각하고 목전의 이익에 집착하다 보니 타자에 대한 고려가 약하다. 상위의 목표를 향한 협력,공존을 위한 절제,차이 속의 일치를 실천하지 못한다. 개인의 우수성과 집단의 파편성,그 괴리가 우리의 약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분명한 것이 아닐까. 첫째,사회에 넘치는 왕성한 발전의 에너지를 큰 그릇으로 담아내고 둘째,누구나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임의 규칙과 합의를 도출해내며 셋째,이것의 실천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민족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가능성을 열어가는 개념으로서 나는 언술문화와 협약정치를 제시하고 싶다. 언술문화의 핵심은 자유 토론이며 토론의 조건은 모든 금기와 억압의 제거,주제와 화자의 완전한 개방,공평한 기회,당연시된 것의 검증정신에 있다고 본다.

협약정치의 뿌리는 민본사상에 있다. 단순한 위민이 아니라 민이 본체가 된다는 것이다. 지도자는 그가 속한 조직의 합의된 의사를 성실히 실천할 의무를 갖는다. 가족의 기대를 가장이 존중해야 하듯이 노사간의 합의를 기업주가 임의대로 파기할 수 없다. 국민과의 약속,선거에 드러난 유권자의 뜻을 선량이 마음대로 유린할 수 없다.

언술문화와 협약정치로 기대하는 것은 편견과 금기를 떠나 모든 쟁점을 자유롭게 토의하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 얻어진 합의를 사회조직과 국가운영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언술적 계몽에 제약이 없다는 것과 관련 모든 집단에 동일한 참여의 기회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부정,부패,압제,불평등이 토론 이전의 인습이나 관행,편견,망각에 닻을 내리고 있는 곳에서는 검증과 합의로 개혁의 지평을 열 수 있다.

반면,우리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검증이 없는 협약은 3당 합당과 같은 밀실정치를 가져온다. 자유로운 정책토론을 거부함으로써 야기된 민자당 전당대회의 불상사는 언술문화의 빈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정당간의 합의에 의해 법률로 규정된 지방자치제 단체장 선거를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연기한 것은 협약의 정신을 파괴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제는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가운영의 새로운 철학과 원칙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문민정치로의 이행이 확실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민주화를 본 궤도에 올려놓고 그 힘으로 경제사회 발전은 물론 남북한의 진정한 화해,번영,통일을 이룩하는 새로운 이념과 실천에 대한 모색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경제개혁의 근간은 민본사상에 있다고 본다. 경제발전의 에너지를 인간자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값싼 노동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능력,지식,기술,자발성,창조성이 존중되는 체제가 요구된다. 그동안은 싼 임금과 정부정책에 의해 경제성장이 촉진되었다면 이제는 노동력의 가치고양과 사회적 협력이 승패의 열쇠가 되고 있다. 분야별 전문가의 처방 이전에 근본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노동자를 언술문화와 협약정치의 파트너로 초청하는 것 외의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정신으로 우리는 마지막 금단의 문을 여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북한,김일성,주체사상,인공기 등이 바로 그 금기의 상징이다. 인공기를 내거는 행동을 지지할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왜 그토록 큰 쟁점이 되며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야만 하는지,인습과 편견을 떠나 곰곰 따져볼 문제다.

밖에서 본 북한은 그 능력이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만나본 모든 지한인사들,전직 주한 미 대사,관료,교수,언론인,사업가들은 하나같이 우리정부의 북방정책,대북정책을 칭찬하면서도 고식적인 대내 안보정책에 대해서는 머리를 흔들고 있다. 국가보안법 같은 낡은 유산을 먼저 조건없이 청산할 수 없느냐는 것이다. 학문의 자유,사상의 자유,표현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함으로써 북한과는 질적으로 다른 자유민주사회를 실현할 수 없느냐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깊숙이 각인된 이 금기를 언술문화와 협약정치로 풀어냄으로써 장외세력을 우리체제의 일부로 포용하고 북한의 긍정적 측면에도 관심을 가지며 이를 통해 남북간의 진정한 이해·교류·협력·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날이 언제 올 것인가.<서울대교수·뉴욕 컬럼비아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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